이웃에 대한 슬픈 단상
이웃에 대한 슬픈 단상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2.09.19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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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강력한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도 도심을 빠져나가는 차들도 아침 일찍부터 도로가 정체되기 시작한다.

추석을 얼마 앞두고 벌초를 가기 위한 차량이 일시에 몰린 까닭이다.

세상이 각박하고 효심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개탄해도 골짜기마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로 시끄러운 것을 보면 아직도 조상을 생각하는 고유의 전통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옛말에 '한마당에서 십촌 난다'고 했는데 십촌은 고사하고 사촌도 명절 때나 집안 대소사가 아니면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형제간에도 외면하고 사는 집이 부지기수인 것을 생각하면 벌초 때 육촌 형제를 만나 수인사라 건네는 것조차 황송할 따름이다.

안을 채우지 않고는 밖으로 넘침이 없듯이 집안에서의 효(孝)가 밖으로 확대되면 이웃 어른에 대한 공경(恭敬)이 된다.

일회성 행사가 아닌 축제가 되어야 하는 집안 잔치에 벌초 참여 여부를 놓고 왈가왈가 하는 소란도 있지만 잠시나마 근황과 안부를 물으며 같은 핏줄임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먼 친척은 가까운 이웃보다 못하다'(遠親不如近隣)는 말처럼 가끔 만나 데면데면한 친척보다 벽을 맞대고 골목을 함께 쓰며 시시콜콜한 집안일까지 알고 지내는 이웃이 나을 때가 많다. 그런데 상을 당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음식 준비부터 장례까지 함께하며 슬픔을 나누던 과거 이웃사촌의 다정한 모습이 이제는 혐오스럽고 면구한 단어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이웃집 아이를 성폭행하고 사체를 유기한 사건에 온 국민이 분노에 떨었는데 이제는 잠자고 있는 아이를 보쌈하듯 둘러업고 나가 성폭행한 사건을 보노라면 알고 지내는 이웃을 서로 편한 존재로 보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최근 청주에서도 20대 여자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용의자가 우암산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모두 이웃이 남만도 못한 경우다.

이웃은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이지만 때론 이해관계에 얽히면 손바닥 뒤집듯 안면을 바꾸는 존재이기도 하다. 가뭄에 물꼬 싸움이 나면 시퍼런 삽날을 들이대는 난폭성 또한 갖고 있다. 그 좋은 예가 현재 일본과 중국이다.

양국이 서로 영유권 주장을 하는 센카쿠 제도를 일본이 국유화하자 이에 반발한 중국이 섬 근처로 천여 척의 어선단을 보내 시위하고, 일본은 순시선을 급파해 위기감을 더하고 있다.

반일감정을 사로잡힌 중국 국민은 일본 대사관, 영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일본제품 불매 운동을 하는 등 양국이 일촉즉발의 위험에 싸여 있다.

올해로 중일수교 40주년을 맞지만 첨예한 이해관계 앞에서는 불편한 이웃일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거센 한류바람에 일본 관광객이 증가하고, 한국 막걸리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는 소식에 조금은 가깝게 느껴지던 일본이지만 독도를 자신의 땅이라 우기는 망언을 일삼는 이웃 나라 일본을 우호적인 시각으로 보기는 어렵다.

특히 '강제 연행했다는 사실을 문서로 확인할 수 없다'는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발언으로 종군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몰염치에 강간 범죄 행위 입증에 '나는 여성을 강간했다'는 문서가 꼭 필요한 것이냐는 자국민의 자조적인 비판에도 끝내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웃을 둔 우리의 모습도 난감할 수밖에 없다.

먼 곳에 있는 물로는 가까운 곳의 불을 끌 수 없듯 (遠水不救近火) 가까우므로 서로의 삶이 녹아들어 문화적으로 친밀하고,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주고받아 살갑고 친근한 모습도 분명히 있지만, 과거에 대한 사과와 반성 없다면 '가까운 이웃을 치고 먼 곳에 있는 나라와 손을 잡는다'는 (遠交近攻)란 말처럼 언제든지 과거 침략과 침탈의 이웃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재 일본이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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