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당보다는 참회를
창당보다는 참회를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1.09.2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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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얼마 전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이 서울시장 출마를 위해 장고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종교 지도자들을 예방하며 출마를 결심한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대한 결심을 앞두고 종교 지도자를 방문하는 것은 무언가를 의논하기보다는 대중에게 종교계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암묵적인 효과가 있어 정치인들이 즐기는 정치적 행동이다. 제·정이 분리된 현대에도 종교적 배경과 성원은 늘 정치권에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을 움직이는 경제적·정치적 실권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벌인 전쟁을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이 많다.

교황이 세속의 왕을 무릎 꿇린 사건이 중·고교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운 카노사(Canossa)의 굴욕이다. 신권을 대신한 교황의 절대 권력은 이후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는 계기가 된다. 7차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아닌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으로 기억될 뿐이다. 훗날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되는 계기는 되지만 교황의 절대 권력은 면죄부를 파는 도덕적 해이로 이어져 암흑시대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에 의해 클레멘스 5세로부터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까지 7대에 걸쳐 아비뇽에 유수(幽囚)가 될 때까지 무소불위의 교황권은 유럽 전역을 지배했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곧 신에 대한 도전이며 그 응징은 죽음밖에 없었다.

근대에 들어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견제하며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대부분의 국가는 물질문명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이기심이 준동할 때나 독재정권에 의해 인권이 유린당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 왔다. 그러나 현재도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정치와 갈등을 일으키는 국가도 있고, 제정일치를 표방하는 국가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처음 종교가 들어올 때부터 외래 종교와 기존의 샤머니즘이 습합(習合)되어 큰 갈등 없이 우리 삶에 잘 녹아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정부와 불교계의 갈등이 불거지더니 급기야는 보수를 표방한 기독교 중심의 창당 움직임이 벌어져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특정 종교 중심의 창당을 바로 보는 시선은 종교계 안에서도 싸늘하다. 종교 고유의 역할을 넘어선 정치참여를 대다수 국민은 원치 않는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일부 몰지각한 종교지도자의 행태가 종교 전체를 대표하진 않는다고 보고 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대신하겠는가?”라는 성서의 구절은 아직도 유효하다. 성추행발언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목사가 강대상에서 하나님 말씀을 설파하고 많은 신도가 자리를 메우고 있다. 장로들에게서 막대한 교회 재산을 횡령한 의혹으로 고소당하는 목사의 모습을 노욕(老慾)으로 치부하기에는 위기의 심각성이 크다. ‘국지주의적 신관’(parochial theology)이나 ‘부족신관’(tribal god)에 사로잡혀 타 종교에 대한 모독을 당연시하는 풍토 또한 자성이 없는 종교계의 현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성경 구절이 인간에게 구원을 주진 않는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돌판에 새긴 십계명이 모세에 의해 깨어진 것은 십계명은 사람의 마음에 아로새겨 전승되는 것이지 돌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가 세속화되어 담임목사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현실과 횡령의혹으로 자식이 부모를, 신도가 목사를 고소하는 현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배금주의 우상을 경계한 하나님의 뜻이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앞에 회개와 참회를 신도에게 강권하기 이전에 목회자 눈에 든 들보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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