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 직지사 ②
경북 김천 직지사 ②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8.2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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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송부일의 문화재 돋보기

경북 김천 직지사 전경

속세의 번뇌 불허 큰 고함소리 귓전에

동·서·남·북 사천왕 모습 올바른 마음 일깨워

해발 1111m 황악산… 금계포란형으로 직지사 품어
보물 670호 후불탱화-606·607호 3층석탑 고찰 입증

송 부 일

경내로 오르면 다시 소나무 사이로 직지사가 열리며 비로전, 대웅전, 천불선원 당우들이 큰 몸을 내 놓는다. 여기서 금강문으로 오르면 금강역사, 인왕이라고도 하는 역사가 불법을 수호하고 서 있다. 대개는 사천왕문 앞 벽에 모셔져 있다. 상체를 벗은 반라로 허리만 옷을 걸치고 날 렵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손에 권법을 짓거 나 불국의 무기 금강저를 손에 가지고 있다. 이를지나면 사천왕문이다. 사천왕은 동쪽의 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북쪽의 다문천왕, 들이 나쁜 것은 버리고 올바른 마음을 일깨워 준다.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동방자국천왕, 남방증장천왕, 북방다문천왕, 서방광목천왕상.

여기서 황악산을 바라보면 금빛 옷을 입은 해발 1111m의 황악산이 좌우 능선에 달린 날개에 금계포란 형으로 직지사를 가슴에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악산,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때 아도 화상이 선산 도리사를 창건하고 나서 황악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에 좋은 절터가 있다. 손으로 직 지하여 직지사라고도 하며. 또는 직지사를 창건한 능여 대사가 자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재서 절을 창건하여 직지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신라 선덕왕 때 자장율사가 1차 중수하고 경애왕때 침묵대사가 한차례 중수하였지만 절이 퇴색, 그 후 네 차례나 중수하였다.

신라 경애왕 3년 견훤이 서라벌을 함락하고 경애왕을 살해하려 하자 이를 구하러온 왕건이 오히려 팔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겨우 목숨만을 구하였다.

직지사 근방에 피해 온 왕건은 직지사에 주석하고 계신 능여 대사에게 사람을 보내 묘책을 상의했다. 하루 만에 삼은 짚신 2천 켤레를 왕건에게 보내주며 말띠 해가되면 큰일이 이루어진다고 예언을 하였다.

그 짚신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왕건의 군대가 이 짚신을 싣고 싸워 이긴 덕으로 곤경에서 벗어나 예언대로 말띠해 934년 후백제를 제압해 통일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왕건이 고마움을 갚기 위하여 직지사를 도아 주어 고려 초 부터 줄곧 사세를 유지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정종의 태를 묻은 태봉이 뒷산 봉우리에 모셔진 덕으로 예전의 규모로 이어 졌다 한다. 그러나 사명대사가 임진란 발전시 승군으로 승전 승전을 거듭하면서 직지사로 사명당이 첫 출가한 사실을 알아내고 보복으로 절에 불을 놓아 큰 병화를 입었다. 그때 43동건물 중 40동이 화재로 타버리고 비로전, 사천왕문, 일주문 만이 겨우 보존됐다. 그 후 조선 영조 때 중수하였지만 퇴색되어 오던 중 오녹원 주지가 발원, 1966∼1981년대 불사 11채의 건물이 신축되고 9동의 건물을 이전 8동을 중수 단장 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동양 제일 도량으로 250동 건물에 2천5백 명의 승려가 기거하고 조선 중기까지 500명의 승려가 항상 머물렀다 한다. 이를 증명 하 듯 현존의 길이 6m, 둘레 3.8m 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목 식통이 남아 있다.

직지사의 역사를 생각하며 경내에 들어서니 역사와는 동떨어진 듯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볼 수 없고 새로 건축한 건물들이 많이 있어 새 절에 온 기분 같다.
경북 김천 직지사를 찾은 일본인들이 발우공양을 하고 있다.

그 중 아도 화상이 창건하고 능여 대사가 중수한 대웅전이 임진란으로 전소되었으나 영조 때 태감스님이 다시 중창한 대웅전이 조선시대 최고의 걸 작품으로 인정되어 서 있다. 80년대에 다시 오녹원 스님이 보수, 단청하였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내부에는 건축 할 때 그린 것으로 보이는 벽화와 조각이 특이하게 수미단을 수놓고 삼존불 뒤에 영조 때 그린 세 폭의 후불탱화가 적색, 녹색, 황색을 주색으로 하여 그려진 것이 보물 제 670호로 지정되어 불국임을 알려준다. 대웅전 바로 앞에 문경 산북면 도천사가 폐허되어 탑 세기가 넘어져 있었던 것을 1974년 직지사로 두기의 탑을. 비로전 앞에 한 기를 대웅전 앞으로 옮겨왔다.

이 탑을 옮겨오려고 할 때 문경 주민들, 관공서, 지각이 있는 사람들의 반발로 무산 된 것을 직지사에서 천고의 노력과 설득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한다.

이곳으로 옮겨 온 석탑이 상륜부가 파손되어 다시 수리하여 세웠다. 대웅전 앞두기는 보물 제 606이고, 비로전 앞은 보물 제607 호로 지정되었다. 진작 자기 고장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고 타 고장에서 빛을 보았다.

비로전에는 천불 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고려 초 능여 대사가 비로 전을 창건할 때 속리산 겸잠 법사를 시켜 조성했다.
보물 제 670호 후불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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