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조대장경 국보급 가치"
"고려 초조대장경 국보급 가치"
  • 한인섭 기자
  • 승인 2008.08.14 2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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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나가도미 히사에 전 대마도역사문화박물관장
대마도 이즈하라항
충청타임즈 기획시리즈 '살아있는 직지' 2부 '임진왜란은 활자전쟁이었나' 취재팀은 일본 현지 취재과정에서 대마도 원로 학자인 나가도미 히사에옹(89·전 대마역사민속자료관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전래 경위와 규모 등을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민속자료관에는 고려 현종 2년(1011년)부터 선종 4년(1087년) 사이 제작된 대장경 600권이 소장돼 있다.

나가도미 전 관장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비롯한 고려, 조선시대 유물의 가치와 대마도 역할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나가도미 전 관장은 또 한국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인쇄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유신 후 유럽 문물을 일찌감치 받아들인 덕분이라고 말했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내 600권 소장
위치상 한국과 밀접… 각종 교류 활발
"일본 상인·무역 등 통해 들어왔을 것"


나가도미 히사에 옹
"일본이 초조대장경을 국보로 지정하진 않았지만, 대마도는 고려 불경 초조대장경을 국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한시대에 전파된 백제성 흔적과 조선식 산성이 아직까지 남아 수십년째 조사가 진행되는 등 대마도와 한국은 밀접한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나가도미 히사에 옹(89)은 고려 목판본 초조대장경을 한마디로'국보'와 같은 존재라며 의미를 크게 부여했다.

나가도미 옹은 "일본은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 이전에는 토기가 넘어 왔고, 고려청자, 백자, 불경, 불상 등 귀중한 물품들을 받아들여 대마도는 물론 본토 신사(神士)와 절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됐다"고 설명하고 "메이지 유신 때 많은 유물이 불탔지만, 초조대장경은 귀중한 문화유산이어서 아직 잘 보관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초조대장경 목판본 종이 질이 서로 다른 점을 고려할 때 각각 다른 시점에서 들여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10세기 초∼10세기 말까지 출간된 점을 고려하면 처음 찍은 것과 나중 것은 인쇄술이나 종이 재질이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30년까지만 해도 대마도 장송사(長松寺)에 보관됐었으나, 관리자가 없어 상태가 좋지 않았다"며"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자료관이 위탁 관리하고 있다 "고 말했다.

민속자료관 초조대장경은 국내 소장본이 300권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곱절 규모 이다.

국내 학계는 대마도 장송사와 일지도 안국사(安國寺)에 소장됐던 것이 자료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송사 소유 유물은 대마도 금조산 강덕사 주지가 입수해 봉안하다 절을 운영하던 지방유지가 메이지 유신때몰락해 절이 없어지면서 넘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가도미 옹은 "메이지 유신 때 진행된 불교 탄압 때문에 사찰이 크게 줄어 들었고, 이 와중에 세력이 강했던 장송사가 사찰을 흡수하면서 유물까지 넘겨 받은 것"이라며 "강덕사는 당시 유물만 빼고 모두 불타 없어졌다"고 말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 대마도에는 사무라이들이 운영(후원)하는 불교 사찰이 많았고, 말하자면 힘의 논리에 통합됐다고 나가도미 옹은 설명했다.

그는 "그 당시에는 '사무라이 5명에 절이 하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찰이 많았다"며 "사무라이 생활이라는 것이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불교가 이들의 안식처 역할을 했던 것은 자연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마을 일이 사찰 법주(주지) 위주로 운영됐다"며 "사찰이 어떤 불경을 얼마큼 소장하고 있느냐에 따라 신도 규모가 달라질 정도였다"고 소개했다.

역사문화박물관 자료집에는 1416년부터 1487년까지 71년 동안 대마도주들(제7대∼10대)이 9세트가량의 불경을 들여 왔다고 소개돼 있다.

역사박물관 소장 대장경 간본에는 고려국 김해 부호장(府戶長) 겸 예원사(禮院使) 허진수가 정종 12년(1046년) 어머니 수복(壽福)과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했다는 기록이 6곳에 나타나 있다. 이때 허진수는 경상남도 김해 인근 서백사(西伯寺)라는 사찰 불복(佛腹) 2개에 공양했다고 한다. 국내 학계는 불복 두 곳 중 한 곳에 있던 불경이 몽땅 약탈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나가도미 옹은 "몽고가 고려를 침입해 불사를 폐쇄하고, 민생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시기에 가장 많은 유물이 전래됐다"며"일본 상인들이 사들이거나, 무역을 통해 가져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도 대마도는 무역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숙박·식사를 제공하거나 통역 역할을 해결해 주고 상인들로부터 물건을 몇 점씩 받았을 것"이라는 게 나가도미 옹의 설명이다. 왜구들의 약탈 방식으로 유물을 가져갔다는 국내 학계의 인식과는 사뭇 다른 내용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는 불경을 비롯한 각종 유물을 귀중히 여겨 대마도 도주들이 본토 실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많이 바치기도 했다"며 "불교 유물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많이 가져왔다"고 말했다.

나가도미 옹은 "대마도의 문화사는 한국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찍부터 밀접한 교류를 가졌고, 귀중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며 "앞으로도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교육자 출신인 나가도미 옹은 대마도 문화재위원, 역사문화박물관장을 역임했다.

2004년 2월 주민들이 100회 답사 기념비를 건립했을 정도로 대마도 역사·문화에 조예가 깊은 정영호 전 한국교원대교수(74·현 단국대 석좌교수)와 나가도미 옹은 각별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대마역사문화자료관에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귀중한 유물과 일본 유물이 함께 전시돼 있다.

◈ 한·일 유물 함께 전시 문화교류 역사 한눈에

대마도 역사문화민속자료관

대마도 역사문화민속자료관은 선사시대 토기부터 고려청자, 불경, 백자 등 한반도에서 전래된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3000년전 한반도에서 전래된 융기문 토기, 무문토기, 팔찌, 물레도 눈길을 끈다. 일본의 농기구, 갑옷, 투구 등 한·일 교류사를 기록한 '宗家文庫史料'도 보관돼 있다. 북쪽으로는 한반도, 남쪽으로는 일본 북부 구주(九州)와의 교역으로 생활했던 대마도 특성 때문에 양 지역 문물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자료관은 한·일 교류사를 압축해 놓은 전시장 역할을 하고있는 셈이다.

임진왜란 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국교회복을 한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더욱 밀접한 관계에 놓였다. 에도막부 시절까지 조선통신사가 오가면서 중요한 교역 통로 이자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역사문화민속자료관에는 당시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와 병풍, 접대 상차림 그림이 전시돼 있다.

자료관 관계자는 "대마도 사람들이 300∼500명에 달했던 사절단 행렬의 현란함에 감탄했다고 한다"며 "조선의 관료와 학자, 문인, 악대, 통역관 등이 동행해 머물렀던 숙소는 일본 학자와 문인들의 학술·예술 교류가 있었다"고 말했다.

자료관 앞에는 조선통신사비와 역사적 의미를 새긴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대마도 역사와 생활 곳곳에 미친 한국의 영향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었다. 자료관 뿐 만아니라 공항, 관광지 등 곳곳에는 한·일 양국 국기와 상징물을 볼 수 있다. 관광객 역시 한국인들이 대부분이다.

자료관 관계자는 "대마도는 한국 이야기를 빼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며 "자료관 방문객도 대부분 한국 관광객이다"고 말했다.
자료관 앞에는 '조선통신사의 비'와 설명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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