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향만리(人香萬里)
인향만리(人香萬里)
  • 신찬인 수필가
  • 승인 2024.05.2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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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신찬인 수필가
신찬인 수필가

 

산기슭을 막 돌아서니 계곡 쪽 비탈에 곰취가 자라고 있다. 아기 손바닥만 한 푸른 잎이 무리를 지어 산을 오르고 있다. 금방이라도 곰취의 부드럽고 쌉싸름한 향기가 온 산에 가득 퍼질 듯하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면서 향긋한 식감이 입안에 가득하다.

입맛을 돋우는 데는 곰취가 제격이다. 여린 곰취잎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된장과 들기름, 고추장을 섞어 버무리면 곰취의 쓴맛과 된장의 구수한 향기, 들기름의 고소한 맛, 고추장의 매콤한 맛이 한데 어우러져서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그뿐인가. 소주를 한 잔 마시고, 곰취잎에 노릇노릇 구워진 삼겹살을 싸서 쌈장을 조금 얹은 다음 입안에 가득 넣으면 그 알싸한 맛은 오랫동안 가시지 않는다.

꽤 오래전 일이다. 봄이 무르익을 무렵, 태백산으로 등산을 갔었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산나물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갓 채취한 곰취가 가게 가득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부드럽고 은은한 봄 향기를 맡다가 문득 생각나는 분이 있었다. 그분 또한, 봄처럼 따스하고 향기로운 분이셨다.

곰취를 사서 우체국으로 갔다. 그리고 서울에 사시는 그분께 택배로 보냈다. 그분은 전화로 `자네에게서 곰취의 향기가 나는구만'하시면서 잘 먹었다고 감사의 말씀을 해 주셨다.

이원종 지사님이 도지사를 하실 때 나는 한동안 비서로 일했었다. 수행비서였으니 자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함께 지내야 했다. 몹시 힘들었지만 난 그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었다.

그분은 충북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KTX 오송분기역을 유치하고, 바이오산업을 충북의 핵심산업으로 자리 잡게 하셨고 충북혁신도시를 유치하기도 했다. 충북발전의 밑그림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 자상하시고 인정이 많은 분이셨다. 밤늦게 도청을 지나다 불이 켜진 사무실이 있으면 야근하는 직원들에게 치킨이라도 사다 주라며 카드를 내밀곤 하셨다.

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시면서 무언가 도움을 줄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곤 하셨다.

당시 도지사 관사 인근에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남학생이 있었다. 지사님은 퇴근할 때 가끔 빵이나 과일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집 앞에 차를 세워 달라고 하셨다. 도로변에 있는 창문을 두드리면 할머니께서 나오셨다. 학생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 때면 간식을 전해주면서 몇 마디 덕담을 남기시곤 하셨다.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와 도지사가 건네준 간식을 먹는 학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할머니께서 대신 전해주는 덕담을 들으며 학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처받은 마음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지금도 가끔 그곳을 지날 때면 그 학생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진다. 그 학생도 이제 마흔쯤 되었을 것이다. 그 학생은 평생을 살면서 이웃에 살았던 도지사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못할 것이다.

화향백리, 인향만리라는 말이 있다.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고 한다. 이원종 지사님이 8년의 임기를 마치고 도청을 떠나실 때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은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책의 제목이 `우리는 벌써 그가 그리워진다'였다.

라디오에서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의 향기가 느껴진거야” 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 향기는 꽃의 향기일까, 샴푸의 향기일까, 아니면 그리운 사람의 향기일까. 은은한 곰취의 향기에서 아름다웠던 그분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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