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프랑스어 수업
나의 프랑스어 수업
  • 박윤미 수필가
  • 승인 2024.05.07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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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윤미 수필가
박윤미 수필가

 

딸아이가 받은 선물 상자에 금빛으로 새겨진 글자 중에 `hiver'라는 단어가 눈에 딱 들어왔다. 영어가 아니다. `이베르~', 잊었던 본능에 연결되듯 진초록빛 상자에 장식된 고요한 겨울 풍경을 배경으로 반가운 음악 소리가 들린다. 샹송이다.

고등학교 때 프랑스어 수업에서 실기 평가를 하느라 배웠던 노래인데 제목은 잊었지만 지금까지도 제법 긴 소절까지 기억하고 있다. 운전하다 행복한 느낌이 들 때면 이 노래가 생각난다. `hiver'는 이 노래의 첫 단어로 겨울이라는 뜻이다.

이 노래 제목을 오늘은 기어코 확인해 보리라 인터넷을 켜고 발음으로 짐작한 프랑스어 단어를 이리저리 고쳐 넣으며 한참 검색했다. 기어코 찾아냈다. 바로 미레유 마티유의 `Mille colombes(천 마리의 비둘기)'였다. `앞으로 십만 년 동안 우리에게 비둘기 천 마리를 주소서.'

온통 하얀 마을에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천 마리의 하얀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온 세상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어린이들의 소망이 울려 퍼진다. 선생님께서는 카세트테이프를 되감기하여 여러 번 들려주셨고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가사 쓰기를 했었다. 커다란 눈으로 나만큼이나 과장된 표정으로 노래하는 가수를 보며 나는 이제야 그동안 해봤던 것보다도 혀를 더 굴려서 목구멍 뒤까지 울리도록 발음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동안 흐지부지했던 뒤 소절까지도 불러보았다. 선생님께서 써주신 사랑의 편지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30년도 더 지나 이제야 열어본 듯하다.

선생님,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가요? 건강하고 평온하시죠? 선생님의 프랑스어 수업 시간을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하며 살아가는 제자가 있어요. 제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져나가 선생님께서 들으신다면 어떤 반응을 하실까 저는 상상해 본답니다. 아마도 빙그레 미소 지으실 테죠? 그때도 그러셨거든요. 작은 목소리, 적은 말씀으로도 매시간 프랑스어로 연극을 하게 하고 샹송을 흥얼거리게 하셨어요. 또 선생님의 운명 같은 사랑 이야기에 가슴설레었던 것도 기억해요. 그때 부끄러워하시던 선생님 표정도요.

시간이 흘러 이제 내가 교사로서 당시의 선생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내게도 아주 특별한 제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민선이다. 일 년에 세 번씩, 추석과 설, 그리고 스승의 날에 짧은 문자를 보내주는데 1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따뜻하다. 그런데 이 민선이가 내게 특별한 이유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는 점이다.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매번 미안하고도 난감하였다. 아주 잠깐만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우리의 접점을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 인다.

그러나 이제는 미안함 대신 큰 기쁨으로 제자의 문자를 받기로 했다. 프랑스어 선생님께서도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실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 만난다면 미안한 내색없이 평온하게 웃어주실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나의 완벽한 짝사랑에 오히려 어깨가 으쓱할 것이다. 작은 유리병 속 편지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간과 내 기억의 조각들이 숙성되는 나만의 방에서 누린 풍요로움만으로도 기쁨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이었던 나를 많이 떠올린다. 어떤 생각을 했던가, 무엇을 어떻게 배웠던가. 그리고 한 교실에 얼마나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던가. 적극적으로 눈을 마주치고 소통하는 학생들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지만 은근하게 메시지를 담아가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자주 생각한다. 학창 시절 수많은 순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 그래도 여전히 아쉽다. 그때 민선이가 어디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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