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식 날 선생님은 6년 개근상을 탄 나를 일으켜 세워 우리 반에서 가장 성실한 학생이라며 박수를 쳐주라고 하셨다. 교육감상을 탄 반장에게도 하지 않은 대접이었다.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선생님의 손길은 그 후로도 불쑥불쑥 생각나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주곤했다.
요즘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는 `개근거지'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교외체험학습신청서만 내면 부모님을 따라 여행도 다니고, 체험학습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데 죽자하고 학교만 나오는 걸 보면 가정환경이 어려워서 일거라는 단정 하에 붙여진 말이라고 한다. 시대가 변하다 보니 이런 말도 생기는구나 싶으면서도 거지라는 말을 이런 데까지 붙여서 성실한 아이들을 매도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건강함과 성실함의 상징이었던 개근이 이렇게까지 변질될 수도 있구나!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예전엔 거지라는 단어를 대단히 불쾌하게 여겨서 가능하면 입에 올리는 것을 삼갔다. `남에게 빌어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농담으로라도 듣기 좋은 사람은 없을 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 말조차도 희화화해서 사용하는 듯하다. 거지방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방이 MZ세대 카톡채팅방에 떡하니 자리 잡은 걸 보면 말이다. 거지방은 여행이나 쇼핑 맛집투어 등 일상을 자랑하는 내용을 올리는 인스타그램과 달리 누가 더 가난한지, 누가 더 절약하는지를 겨루는 방이다. 어느 부분을 더 아껴야 하는지 정보교환도 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나름의 노하우를 제시하기도 한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라는 끈끈한 공감대로 뭉쳐진 이 방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어서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거지방에서의 체험 수기도 올리고 카톡 내용도 오픈하면서 유쾌하고 건전하게 거지방의 탈출을 꿈꾸는, 어찌 보면 짠한 우리의 젊은이들을 어려운 시절을 살아 낸 동지의 마음으로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 재미삼아 사주를 봐준 지인은 내가 거지사주이지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굶지는 않고 살겠다는 말을 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 듯도 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살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다. 주변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모두 빈 몸으로 왔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거지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 사람구실을 하며 살기까지는 우리를 거두어 키워주신 부모님의 헌신이 있었다. 지식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계셨고, 아픔을 치료해준 의사가 있었다. 외로움을 채워준 친구가 있었고, 사랑에 눈 뜨게 한 연인이 있었다. 혼자 컸다고 큰 소리 땅땅 치는 사람도 있지만 혼자서는 클 수 없게 태어난 것이 인간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거리에선 벌써 꽃향기가 느껴진다. 노란 꽃 치마를 펼쳐 입은 산수유, 잘 그린 동양화 한 폭을 보는 듯한 매화, 아직 입을 다물고 있는 목련도 곧 이어 그 우아한 입을 열어 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것이다. 산야의 작은 풀꽃 하나도 혼자서는 피어나지 못한다. 햇살과 비와 바람의 조화로움이 있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이 저 꽃들과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도록 햇살과 비와 바람이 되어준 고마운 분들에게 새삼스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내 생애 처음 맞는 2024년의 봄을 두 팔 벌려 맞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