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에서 찾아지는 온달산성과 바보 온달장군
문헌에서 찾아지는 온달산성과 바보 온달장군
  • 양병모 충북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 승인 2023.08.2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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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문화유산 이야기
양병모 충북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양병모 충북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단양 영춘면 하리 성산 정상부에 위치한 온달산성(사적 264호. 1979.7.26)은 고구려에 의해 쌓았다고 인식되어 왔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 따르면 고구려는 단양군 영춘지역에 내생군(奈生郡)의 속현으로 을아단현(乙阿旦縣)을 설치와 한주(漢州)·삭주(朔州)·명주(溟州)에 속한 각 郡·縣이 `고구려고지(高句麗故地)'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을아단현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단양군 영춘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로 기록되어 있다.

단지, 온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열전에 기록 되어 있는데, 온달전에는 아단성(阿旦城)이 온달의 전사처로 나온다.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이다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또한 온달의 출정 목적지인 `계립현(鷄立峴)·죽령이서(竹嶺已西)' 지역이 전사처인 `阿旦城'이란 지명과 더불어 을아단성과 대입시켜 온달산성을 아단성으로 인식하는 근거가 되었다.

조선시대 15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 영춘현조에는 온달과 관련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영춘현 古跡에 온달산성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성산고성(城山古城)은 석축둘레가 1,523척이고 높이가 11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는 기록과 영춘현 산천조(山川條)에는 “성산은 영춘현의 남쪽 3리에 있으며 영춘현의 진산(鎭山)이었다. 산의 아래에는 석굴이 있는데, 높이가 1장 정도이고 너비가 10여 尺 정도이다. 깊이 들어감이 끝이 없고 굴의 틈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데, 그 물의 깊이가 무릎을 넘치며 맑고 차가움이 얼음과 같다. 사람들이 횃불 10개를 가지고 들어갔는데도 굴의 끝은 보지 못하고 횃불이 다 타서 그냥 돌아 나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산고성은 지금의 온달산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성산 아래의 동굴은 온달동굴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지리서 중에 `연려실기술·대동지지·만기요람 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기록된 성산고성(온달산성)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한편, `여지도서'·`영춘읍'·`증보문헌비고' 등은 성산고성(온달산성)에 대한 기록을 답습하면서도 온달축성 설화를 추가하였다. 고성(古城)으로 표기하면서 “옛 전언에 따르면 고구려 을아조(乙阿朝)에 온달(바보온달장군)이 쌓았고……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온달축성 설화를 기록하지 않았으나 청구요람(靑邱要覽)을 보면 계립령(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일대)부근에 `고구려온달패몰처(高句麗溫達敗沒處)'라고 기록 되어있다. 이유는 온달의 전사처로 죽령의 서쪽 즉, 충주 계립령으로 보고, 온달산성과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다.

1872에 제작된 `영춘현지도'에는 온달산성을 사각형으로 표현하고, 산성에 대한 설명과 온달이 축성하였다는 설명이 기록되어있다. 18세기에 단양군 영춘현의 성산고성이 온달이 축조한 성이라는 기록이 추가되었고, 일제강점기 1942년에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도 성산고성이 온달성(溫達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까지도 단양 가곡면 향산리와 영춘면 백자리·화산리·장발리 지역에는 온달과 관련된 지명인 면위실·장군목·온달산성·온달동굴·육판바위·입석·선돌·흙성 등의 지명 확인되고 있다. 이 지명의 이야기에서는 온달의 여동생, 마고할멈, 평강공주 등 다양한 인물들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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