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7000억 국책사업이 장기판의 졸인가
1조7000억 국책사업이 장기판의 졸인가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3.07.09 18: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엊그제 서울~양평 고속도로 백지화를 선언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장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장기판이 떠올랐다. 김건희 여사 일가 땅 근처로 종점이 변경됐다는 야당의 `장군'에, 딴지를 걸면 아예 사업을 접겠다는 백지화 선언으로 `멍군'을 부르는 장면이 그짝이었다.

원 장관의 대응이 한편으론 묘수로 읽혀지기도 한다. 사업 포기가 앞으로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야당의 공세를 차단할 수 있는 유효한 선택지 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불리할 수밖에 없는 김여사 일가 특혜 공방을 사업 존폐 논란으로 전환시켜 국면을 탈출하는 효과도 노렸을 터이다. 책임을 야당에 씌워 사업 백지화로 낙심할 양평군민을 자극하는 일종의 선동 효과도 기대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제 국민의힘 소속 양평군수와 주민들이 민주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은 서울~양평 고속도로를 가로막는 모든 행위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지난 2017년 계획이 수립돼 2021년 예비타당성조사를 마치며 구체화됐다. 이 과정에서 종점은 줄곧 양평군 양서면으로 유지됐다. 그러다가 이번 정권이 들어선 지난해 고속도로 종점이 양서면에서 김여사 일가가 부동산을 보유한 강상면으로 변경됐다. 호재를 만난 야당은 특혜 공세를 펼쳤고 급기야 장관이 사업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국민의힘은 민주당 출신 전임 군수와 지역위원장이 이미 2년전 나들목 신설과 함께 노선 변경을 요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인 노선변경은 지난해 7월 양평군 건의에 의해 추진됐다며 국토부 기획설을 반박하고 있다. 원 장관은 김여사가 관련된 땅의 존재 여부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며 “장관직을 걸겠다”고도 했다.

원 장관은 의혹을 제기한 민주당을 `날파리'에 빗댔지만 갑자기 고속도로 노선변경을 결정한 배경 설명에 충실했는지는 돌아볼 일이다. 조금이라도 집권층의 허물이 드러나면 침소봉대하며 공세를 펼친 것이 역대 야당의 생리였다. 문재인 정권 시절 국민의힘이 고속도로 종점 변경지에서 영부인 김정숙 여사 집안의 땅을 발견했다면 조용히 넘어갔겠는가?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야당뿐 아니라 많은 국민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원 장관은 사업 백지화라는 정치적 선택보다 국민 설득에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민주당이 가짜 뉴스 선동을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 사업 백지화를 재검토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공감을 얻기 어려워 보인다. 야당의 무모한 공세를 부각하고자 한 발언으로 보이지만 초대형 국책사업의 존폐를 야당의 선택에 맡기겠다는 발상에선 대권을 노리는 잠룡의 중량감도 장관의 체모도 보이지 않는다.

해서 원 장관의 사업 백지화 선언은 자칭 `고뇌의 결단'에도 불구하고 악수로 평가받을 공산이 높다. 우선 그의 바람대로 민주당이 공세를 자제해서 사안이 잦아들 공산은 희박하다. 민주당은 사업을 조급히 중단한 내막까지 치고 들어올게 뻔하다. 백지화를 밀어붙이기도 어려운 형국이다. 특혜 시비에서 빚어진 사달인만큼 강행할 명분이 떨어지는데다 총선을 앞두고 수혜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대통령실은 지난 9일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은 국토교통부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라고 밝혔다. 공식적으로 전권을 맡김으로써 원 장관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분석이지만 결과에 책임을 지라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그가 이 사태를 수습하는 길은 하나다. 한치 앞 수싸움에 몰두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합리와 원칙을 중시하는 행정가로 돌아가는 길이다. 무엇보다 백지화 철회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조7000억원짜리 국책사업을 장기판의 졸처럼 가벼이 다뤘다는 비판을 내내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