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국 대사 당장 불러서 태극기 앞에 무릎꿇고 사과하라고 해.”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전화기를 내동댕이 치며 흥분하는 장면이 나온다. 옆에 있던 경호실장은 “국권침탈의 현장” 이라며 “당장 미국에 특사를 보내 항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영화는 지난 1978년 미국 CIA가 청와대를 도청했다는 보도가 외신에 터진 후 벌어진 실제 상황을 다뤘다. “대통령 집무실이 뚫릴 때까지 중앙정보부는 무얼 했느냐”는 질책을 당한 정보부장이 미 대사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훈계만 듣고 돌아오는 장면도 이어진다.
영화에서와 같은 상황과 대화가 실제 있었는지는 불분명 하지만 당시 박 통이 노발대발했던 것은 사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항의는 소극적 차원에서 이뤄졌고 얻은 것도 없었다. 한국은 미국 언론의 청와대 도청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부인 성명을 내달라고 미 정부에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이후 박 통과 참모들간의 중요한 대화는 경내 산책로에서 이뤄졌다는 후문만 전해졌다.
최근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국가안보실 고위 관계자들의 대화를 감청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기밀문건이 유출돼 파장이 커지고 있다. 문건에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제공하는 문제를 놓고 지난달 초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비서관이 주고받은 대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비서관은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우리 정부의 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고, 안보실장은 포탄을 폴란드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우회 판매하는 고육책을 언급하기도 한다. 전쟁 당사자인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민감한 내용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압박해온 미국이 우리 고위 당국자들의 고심에 찬 논의를 엿듣는 데만 그쳤을까? 대화를 도청 당한 두 사람이 지난달 차례로 자리를 물러난 배경이 새삼 주목되는 이유이다.
미국이 피아를 가리지않는 무차별적 정보전을 전개한다는 것은 정설로 굳어있다. 지난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NSA) 출신 스노든이 NSA가 독일과 한국, 일본, 프랑스 등 수뇌부들을 도청한 사실을 폭로해 오바마 미 대통령이 사과하고 중단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NSA가 유럽과 일본 등의 정치인들과 고위 당국자들을 도청해온 사실이 잇따라 폭로됐다. 그 때마다 항의와 사과가 거듭됐지만 도청당한 국가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종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이젠 미국이 도청을 한 게 문제가 아니라 도청이 발각된 게 문제라는 인식이 일반적인게 됐다.
미국의 도청 벽이 불치병 수준이고 우리만 대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번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미국이 악의를 갖고 했다는 정황은 없다”고 말했다. 당한 한국이 아니라 미국을 중심에 둔 화법이다. “악의는 없었다”는 미국이 해야 할 변명을 우리 국민이 한국 외교 사령탑의 입을 통해 듣는 모양새가 됐다. 그는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며 “미국과도 의견의 일치를 봤다”고도 해명했다. `유출된 대화 정보가 가짜이니 더 이상 문제 삼을 게 없다'는 의미로 들렸다. 듣는 사람들은 조작됐다는 내용이 무엇인지, 도청은 실재했는 지 궁금하지만 그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같은 주제로 질문을 하면 자리를 뜨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우방을 믿지못해 대통령실까지 도청하는 미국이 동맹국이냐는 비판이 쏟아지지만 김 1차장은 “세계 최강의 정보국인 미국의 능력과 역량을 함께 업고 활동한다는 것은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미국의 큰 자산이 될 분이다.
그래도 45년 전 박 통 때는 관제 반미시위를 기획하고 미 정부에 항의 각서를 보내기도 했었다. 반향없는 메아리에 그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