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전쟁
사랑과 전쟁
  • 김일복 시인
  • 승인 2023.01.2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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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김일복 시인
김일복 시인

 

허락도 없이 부스럭거리며 살갗에 앉는다. 너를 만났거나 헤어졌다가도 다시 만나 헤매던 시간을 기억하려 한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개가 현실처럼 진행되다가 결국 뭔가에 쫓겨 잠에서 깨게 된다. 순간 생생했던 기억이 아른거릴 뿐 머릿속은 온통 하얗다. 일상적인 감정이 피곤해지면 어떤 일이 생각했다가도 금방 잊어버리곤 한다. 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것일까?

불완전한 조각들이 삶의 열정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낮에만큼은 온전히 깨어 있고 싶어 잠과의 사투를 벌인다. 특히 밥만 먹으면 졸음이 밀려온다. 식곤증과의 전쟁이다.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니다. 잠이란 놈은 이렇게 내 삶과 사투를 벌인다. 잠을 지배하는 사람이 자기 삶을 지배한다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전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잠은 오는데 잠은 잘 수가 없는 통증의 시간이다. 목덜미에 압박이 가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식도를 타고 갑갑함이 밀려온다. 마치 죽음의 강을 건너가기 전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것 같다. 불안과 급한 마음에 뒤통수를 두드려보고 손가락으로 군데군데 찔러본다. 잠시 후 공포에서 벗어나 피곤함과 통증이 사라지는 듯했다. 곧이어 연신 하품을 한다. 이런 반복된 경험을 나만 하는 것일까?

오늘도 용기를 내어 잠을 청해 보지만 평생 자야 할 잠을 자지 못한다. 기선제압이라도 하듯 두 손 모아 가슴에 올려놓고 정성껏 호흡을 한다. 다음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어 보기도 하고, 모든 상상과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추측이나 잡생각을 최대한 해 본다. 왜냐면 잠이 솔솔 오다가 또다시 잡생각이 떠오르면 금세 불면증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내일 특별한 일을 기대하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뇌에서 발생하는 파장을 제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내일이 걱정되는 이유가 뭘까?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은 오지 않고 뜬구름 잡듯 헛된 생각과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지쳐갈 무렵 습관처럼 주문을 왼다. `얼른 자자, 잠자기는 틀렸다, 아니 자야 한다. 어젯밤처럼 몸이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면 잠이 오겠지. 그러니 어서 자자.' 잠시 후 의식이 사라진다. 꿈속일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꿈속에서 새벽에 다가올 고도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생의 언어를 기다린다. 불현듯 나타나 속삭이듯 사랑의 언어를 살갗에 얹혀 놓고 달아날까 걱정이다. 기다린다고 오는 그리움이 아니다. 그래서 그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놓치는 순간 허무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늘 사투를 벌이면서 한 번의 숨으로 긴 호흡을 끌어낼 때도 있다. 백전백패는 아니다, 이럴 땐 자다가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몰두하고 집중하는 삶은 끝없는 의식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호접지몽(胡蝶之夢)이든, 다른 세계로 간다고 해도 나는 두렵지 않다. 기억되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기억으로 남아 기억될 때 그 또한 은총이요. 사랑이다. 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있는 의미가 없다. 나는 잠이 있으므로 내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잠을 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잠과 전쟁을 하고 또 화해한다. 느지막이 서서히 익어가는 잠과 함께 평생 싸워야 하는 전쟁이 끝나면, 나 아닌 내가 최면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잠과 잠으로 설레는 전쟁을 기다리지만, 사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고 일어나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참치는 잠을 자지 않고 평생 헤엄치다가 일생을 마친다. 참치는 입을 벌려 통과하는 물에서 산소를 받아들여 호흡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고 한다. 참치에게는 불면증이 없다. 사랑과 전쟁에서 해방되는 일은 매일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기억을 담아두고 실천하는 것이다. 반드시 게으름을 이겨내고 코를 골며 깊은 잠을 자야 한다. 그 또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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