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에 멍울지는 시
이슬에 멍울지는 시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9.0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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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의 문학칼럼
'음미(吟味)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삶 속에서 작은 틈새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현대인에게는 쓸모 없는 경고문에 불과하다. 그들의 삶은 마치 제동장치가 풀린 질주 차량으로 보여진다. 증시가 폭락할 때마다 와르르 쏟아지는 절망처럼 불확실하고 음미할 여유조차 상실한 삶이다. 그들에게는 추락만 있을 뿐 그것을 완화시킬 진정한 날개는 없다.

생래적(生來的)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바쁘게 허둥대길 원치 않을 것이다. 아침 창을 두드리는 햇살에 잠 깨어 이슬에 젖은 대지의 엄숙함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들려 있으면 산으로 오르는 아침 안개 바라보기 더욱 편하리라. 실상 인간의 영혼은 일상 속에서 버림받은 것들과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전혀 무의미한 듯 보이거나 땀에 젖은 창녀의 시트처럼 천박하게 팽개쳐진 것들의 벗일지도 모른다.

신동인의 시는 팽개쳐진 그 허름한 것들의 벗이기를 자청한다. 소우주에 그렇게 있을 때 그는 이슬 한 방울에도 피멍이 든다. 그가 순수에 절망하는 풀잎 같은 사람이므로 그러하다. 대상을 향한 한 차례의 느닷없는 질주를 통해 그것과 일체를 이루는 모습은 아슬하고 무모해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감수성과 시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일이니 탓할 수 없다.

시의 세부는 매우 자연 친화적이다. '들국화 도미솔, 누님 외딴 집'에서처럼 人事와 사물들이 자연스럽게 대응된다.

그는 혹여 녹슨 동전 다시 빛나게 할 수 있는 젖은 모래처럼, 시가 우리들의 병 깊은 영혼을 세례하리라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 첫머리에서 하늘의 불빛과 인간 내면의 불꽃은 구별되지만 서로에게 낯설지 않다고 믿던 시대에 대한 감회어린 찬사를 다음과 같이 쏟아 놓았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이제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별빛이 동일하다는 믿음은 유효하지 않다고 해도 우리가 일순간이라도 행복에 젖을 수만 있다면 그 '환상적 리얼리즘'에 빠져 세월을 거슬러 올라도 좋으리라. '환원될 수 없는 세계'라는 규정이 독자들의 여행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여행이 끝난 곳에서 길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신동인 문학을 관류하는 서정의 주조(主潮)다. 그의 내부에 다 연소되지 않은 외로움이 있어, 그 상처의 잎새마다 새로운 의미들이 맺힌다면 그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아름다움이다. 창공의 별을 혼자 남아 헤는 서정의 모습이 깨끗하고 순수해 보인다. 그는 늘 버릴 수 없는 천연기념물 같은 순수 때문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절대 고독과 연결되지만, 종교적 성격은 갖지 않는다. 그는 내 생명 네 생명 그리고 풀꽃과 나무들, 그 중에서도 유독 키가 큰 해바라기와 사랑의 묵계( 契)를 버리지 않고 존재론적 주관주의에 깊게 빠져 있다. "민들레꽃은 민들레꽃이면 된다"는 민중적 진솔함 그 이상의 역사주의와는 관련하지 않는다. 이 또한 관점에 따라서는 약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동인 시인과 마주 앉아 있으면 알껍데기를 깨고 있는 병아리 주둥이같이 분주하던 일상이 갑자기 여유롭고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는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의 시가 그렇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을 접할 때마다. 선(禪)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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