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를 은유함
봄비를 은유함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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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겄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서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봄비>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40년을 훌쩍 넘긴 세월에도 해마다 봄비가 내리면 한 글자도 틀림없이 이 시가 암송 된다. 당시의 정경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일도 신비로운 일이다.

엊그제 비가 꽤 많이 내렸다. 봄비치고는 적지 않은 강우여서 우산을 쓰고 걷는 새벽 산책길이 낯설다. 세상 만물은 그때마다의 감정에 따라 사뭇 다른 모습으로 느껴진다. 하룻밤 사이에 극과 극으로 달라지는 자연의 풍경이 있으랴만 절반을 못 채운 사람들은 근심하고, 절반에 부족한 또 다른 쪽은 모자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전환의 시절. 봄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내 마음 속 봄비의 정경은 부드러움으로 남아 있다. 검은 교복을 입은 채로 교실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코끝에 매달리던 아련한 내음. 소리 없이 대지를 적시던 가녀린 빗줄기에 대한 추억은 계집아이 같다는 동무들의 핀잔도 부끄럽지 않았다.

봄이 되면 모든 냇물은 겨울보다 더 커진 소리로 세상을 깨우며, 덩달아 내 소년의 심장도 요동치게 했는데. 이번 봄비는 긴 겨울 가뭄 끝에 적지 않게 내린 탓인지, 냇물의 흐름도 사뭇 거칠고 요란하다. 한꺼번에 치달아 넘치도록 기세를 떨치는 빗물은 아무래도 불편하다. 겨우내 묵었던 도시를, 그리고 잿빛 포장을 들쑤신 빗물은 온갖 악취 또한 한꺼번에 풀어내면서 아련해야 할 봄내음을 쫓아내고 있다.

봄비는 살포시 내리면서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며 얼었던 모든 생명에게 소소한 기운을 부추기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므로 풀밭에 저항하지 않고, 함부로 고여 넘치지 않으며, 천천히 낮은 곳으로 향한다.

다만 키 큰 줄기 끝에서부터 나무의 온 몸을 어루만지며 아래로 흐른 봄의 빗물은 고스란히 밑동에 모여 오롯이 긴 겨울 목말랐던 나무의 갈증을 풀어주면서 잠을 깨운다.

속도가 기세등등한 봄비는 곤두박질하듯 직선으로 정면을 향할 뿐 오른쪽과 왼쪽, 앞과 뒤 등 평면을 돌아보지 않는다. 한참을 지나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러야 비로소 파랗게 윤기 도는 초록생명과의 만남을 허락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가 맺지 않는 과목은 뿌리째 뽑고/ 그 뿌리를 썩힌 흙 속의 해충은 모조리 잡고/ 그리고 새 묘목을 심기 위해서/ 깊이 파헤쳐 내 두 손의 땀을 섞는 흙/ 그 흙을 깨끗하게 실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삼킨 어둠이어도/ 바위 속보다도 어두운 밤이어도/ 그 어둠 그 밤을 새워서 지키는 일이다./ 훤한 새벽 햇살이 퍼질 때까지/ 그 햇살을 뚫고 마침내 새 과목이/ 샘물 같은 그런 빛 뿌리면서 솟을 때까지/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전봉건. 사랑> 봄비는 어느 때고 설렘이다. 푸르던 소년의 시절로 순식간에 되돌려 놓고 숨겨 두었던 시심(詩心)을 자극하니, 은근히 힘을 솟게 한다. 꽤 많은 비가 내려 작은 놀람을 불러오는 봄비일지라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풀빛이 짙어' 오는 추억을 실감하며 젊은 시절의 푸른 희망을 깨우치게 한다. 그러므로 봄은 사랑으로 충만할지니.

사납게 내리던 봄비는 그쳤고, 날은 따사로운데, 아무래도 아직은 방심할 시간은 아닌 듯하다, 가슴 깊은 곳에 묵혀 놓았던 시(詩)를 꺼내 읽으며 어쩌면 더 긴 날을 깊은 인내심으로 채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인 강둑에 풀빛 더욱 푸른데/ 정든 님 보내는 남포의 슬픈 노랫소리/ 대동강 물은 언제 다 마를 수 있으랴/ 해마다 이별 눈물 더하는 것을.」

고려 문인 정지상의 <송인(送人)>만큼 봄노래의 절창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봄비는 그쳤으나 아직 우리는 시작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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