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기
부끄럽지 않기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2.03.0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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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성당 울타리에 벽보가 붙었다. 매일 운동 삼아 걷는 길 중간 지점에 우리 동네 성당이 있다. 지난여름 동안 울타리 옆을 지날 때마다 쪼르륵 타고 올라간 덩굴손과 보랏빛 나팔꽃이 많은 기쁨을 줬었다. 나팔꽃의 꽃말처럼 말이다.

그 울타리에 기다란 선거 벽보가 붙은 것이다.

이번 대통령 후보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TV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몇몇 후보는 물론 그 외 다른 후보들까지 무려 14명이나 돼서 깜짝 놀랐다.

어제 후보들의 TV토론을 봤다. 최근에 책에서 본 인디언의 계급 없는 원형사회가 떠올랐다.

인디언들은 부족회의를 할 때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말하는 지팡이를 사용한다. 말하는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만이 말을 할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침묵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또 말하는 지팡이를 잡은 사람은 가슴에서 나오는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암묵적 법칙이었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추장이 부족 사람들의 뜻에 따를 때만 그 지위가 보장되었다.

만일 그가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려고 하면, 밤에 잠든 사이에 부족 사람들은 천막을 챙겨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추장은 자기 혼자 남겨진 것을 발견하곤 했다. 이렇게 인디언들은 추장을 바꾸기 위해 문명인들처럼 구태여 4년 동안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선거철과 맞물려서 이 내용이 생각났었나 보다.

얼마 전 남편도 선거에 나갔었다. 지역에 있는 조합에 이사 후보였다. 지난 8년 동안 해왔던 일이었기에 떨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투표가 있던 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위로주 한 잔 마시자면서 낙마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 포도주를 한 잔씩 나눠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선거 과정에서 몇 가지 석연치 않았던 부분이 분명 있었다. 남편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한지 쉽게 잠들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남편의 심정이 헤아려져 나도 뒤척였었다.

다음 날 아침 다행히 들끓던 거품이 잦아든 듯한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남편이 말했다. 아쉽지는 않은데 사람들 보기가 좀 창피하다고.

내가 말했다. 당신은 죄를 짓거나 나쁜 일을 도모한 것이 아니므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고.

그 말이 남편에게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인디언이 `결혼은 두 사람이 카누를 타고 여행하는 것과 같다. 남자는 앞쪽에 앉아서 노를 젓는다. 여성은 뒤쪽에 앉아 있지만, 방향타를 잡고 있다'라고 한 대목에서 나는 동감했었다.

그리고 30여 년 여행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방향타를 굳건히 잡아준 게 나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음을 깨달았다.

유세 장면을 보면 유행가를 개사한 선거로고송을 부르고 노래에 맞춰 신나게 율동까지 하는 걸 볼 수 있다. 저마다 자신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보여주는 부분만 말고 그 안에 감춰진 진의를 알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후보자들에게 마이크 대신 인디언 지팡이를 들게 하고 싶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어쨌든 이번 선거는 당선된 사람도, 낙선의 고배를 마신 사람들도, 표를 행사한 유권자들까지도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은 그런 선거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부터 선거공보 전단을 펼쳐 살펴보고 비교해 따져볼 참이다. 방향타를 제대로 잡기 위해서. 부끄러운 유권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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