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대체휴무의 `덤'을 얻은 가을밤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네 분의 어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몇 년 만의 해후인지라 나를 포함한 다섯 명 모두 행복한 분위기였는데, 이날 저녁 3시간을 넘긴 식사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나는 <수요단상>에 대화 내용을 `기록'하면서 네 분의 호칭을 각각 베이컨씨, 다빈치씨, 벤야민씨, 샤르트르씨로 칭하기로 했다. 나를 제외한 네 분의 등장인물은 각각 행정 및 정책과 창작, 연구 및 문화 지원, 모국어에 대한 철학과 신념, 그리고 실천이 뚜렷하신 분들인데다, 기억하고 있는 대화 내용을 `기록'으로 현상하는 일에 동의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화두는 `문화'와 `기록', 즉 지역과 나라와 당대의 사람이 유지해야 할 역사성에 대한 아쉬움으로 시작되었다. 그 중요성은 실천력의 부족이라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절감하는 `공유'의 영역이어선지 화제는 걱정만큼 깊어지지 않았다.
`문화'와 `기록'에 대한 대화는 `요즘 젊은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진다. 가장 연장자인 베이컨씨는 “BTS가 대단한 거는 알겠는데, 노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탄식과 함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기성세대의 우려를 숨기지 않는다. `얄리 얄리 얄라셩'과 `가시리 가시리 잇고'를 거론하며 고려의 대중가요가 지금 `고전'이 되었다고 반론. 그리고 판소리 <수궁가>의 한 대목을 서양악기와 현대적 리듬, 그리고 흥겨운 춤사위로 융합시키면서 전 세계 2억뷰 이상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날치밴드'의 <범 내려온다>를 소개하는 대화의 흐름은 격정에 가깝다. 좌중은 한국인 특유의 창조적 DNA와 문화의 진화와 인류 보편성을 위한 도전에 찬사를 보내는 건배로 이어갔다.
이어 다빈치씨의 백남준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인의 문화적 우수성에 대한 각별한 자긍심으로 강조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20세기 100대 예술가, 세계의 작가 100인의 수사는 “평면과 입체를 막론하고 형질을 갖고 있는 도구를 통해 구현되었던 그때까지의 예술적 가치를 미디어의 세계로 디지털화한 창시자”로서의 위대함에 대한 감탄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새롭고 도도한 물결로 예술사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미디어 아트는 모두 백남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며 탐구를 통해 아직도 탐구에 전력하는 원로 창작자 다빈치씨의 녹슬지 않는 열정이 새삼 존경스럽다.
한국인의 문화 DNA와 세계적 보편성으로 확산되는 저력과 자긍심에 대한 대화는 요즘 가장 뜨거운 <오징어 게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전통놀이와 생존을 위한 자본의 탐욕을 경계하는 문화적 창의력에 대한 찬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유통 지배력에 대한 우려와 극단적 표현 방식, 그리고 고령자들이 접근, 향유하기 어려운 문화의 소비방식에 대한 걱정으로 치닫고 있다.
마침내 대화는 `언어와 문자'로 이어진다. 문화적 우수성과 세계적 한류문화의 소비 확산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모든 표현의 근간이며 창의성의 원천인 한글의 위대함에 대한 내부적 치열함은 부족한 실정이라고 진단한 노익장들의 대화는 `천의 고원'을 넘나들며 마침내 청주시 내수읍 초청에 복원된 세종대왕 행궁으로 순간 이동하면서 지역의 원형질에 대한 문화적 소중함으로 귀착된다.
공학과 공간분야에 천착해왔던 샤르트르씨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집중적 탐구는 언어와 문자, 모국어와 표기에 대한 괄목할 공부의 치열함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대화의 희열을 한층 키우고 있다.
어느덧 코로나19 통금시간이 다 되었는지도 모른 채 키워 온 가을밤의 깊은 이야기는 `하늘로 쏘아 올린' 백남준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환상으로 아로새겨지는 레이저 불빛을 노익장들의 가슴에 수놓고 있다. 그날 `대화'로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다짐한 나는 가장 아름다운 가을밤에 흠뻑 젖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