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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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운숙 수필가
  • 승인 2020.07.0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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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운숙 수필가
최운숙 수필가

 

지지직, 통화 내내 우는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오늘 이사 나가는 집의 이삿짐 내리는 소리인가 귀 기울여보지만, 그 소리는 아니다. 땅이 잠에서 깨듯, 산수유나무가 깨어나는 소리인가.

용암동 소라아파트 2층에 사는 K씨는 이곳에서 노모와 함께 이십육 년을 살았다. 얼마 전 노모가 돌아가시자 집을 처분하기로 했다. 이 집을 계약한 분은 이십 대 예비부부다. 얼굴만 봐도 화사한 봄꽃이 활짝 필 것 같이 환하다. 대출 한도를 최대로 높여 받았지만, 신혼집을 마련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잔금까지는 열흘이 남았다. k씨의 배려로 현재 공실인 집을 수리하기로 했다.

벽지를 뜯어내고 벽지 안에 갇혀 있던 눅눅한 체취를 밖으로 내보낼 것이다. 싱크대 곳곳에 남아있는 세월의 지문들을 쓱쓱 닦아내고, 흰색 시트지를 단정하게 붙여 놓으면 싱크대가 회춘할 것이다. 화장실 공사는 돈을 조금 더 모아 하기로 했다. 장판을 걷어내면 `훅' 하고 안겨 오는 비릿한 냄새, 오래도록 이 집에 터 잡아 살던 묵은 기운의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 한낮의 반쯤, 창문을 활짝 열어두면 구석구석 남아있던 황혼의 색은 제 길을 찾아갈 것이고, 그곳에 갇혀 있던 냄새들은 하나씩 소멸해 갈 것이다. 이제 이 집은 젊은 기운으로 바뀔 것이다. 부부는 부푼 꿈을 꾼다.

산수유나무도 집수리를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땅에 며칠 전 내린 비를 모아 뿌리에 숨구멍을 냈다. 이끼처럼 땅이 들숨 날숨 숨을 쉰다. 주문한 햇살은 아직 제주도에 머물고 있다. 구례쯤 도착하면 이곳은 더 바빠질 것이다.

이곳에 도착하면 뿌리에 둔 물길을 길어 올려 어린 가지들의 물길을 만들고 겨우내 걸치고 있던 껍질을 쓱쓱 벗겨 내 얇은 숨구멍을 내줄 것이다. 기지개를 켜듯 노란빛 봄꽃이 일시에 반짝거릴 것이다. 지난해 옥탑방에 세 들어 살던 까치네에게는 만기 통지를 보내고 개미들이 오르내리던 길에 칸막이를 설치하여 각각의 방에 에어컨도 놓아둘 것이다. 까치네에게서 계약 갱신 여부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부부는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삼월에 결혼할 예비부부다. 가진 돈에 희망을 보탰으니 그들의 봄은 가장 행복한 봄일 것이다. 잔금 전에 집수리를 허락한 K씨는 깐깐한 공무원이다. 원칙이 우선인 그가 예외를 적용한 것은 젊은 그들의 미래를 축하해주는 마음일 것이다. 어쩌면 오래전 누군가에게 빚진 마음을 이들에게 갚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은 돌고 돈다. 봄은 눈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온다. K씨의 한발 배려는 젊은 부부의 두발 봄이 되었다.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었다. 노란 별꽃이 생명을 쓰다듬고 있다. 멀리 구례의 잔치 소식이 전해 온 지 일주일이다. 산수유나무에 물이 도는 소리가 난다. 섬진강의 물길을 따라 내륙의 깊숙한 곳에 강처럼 도착했다. 물과 빛이 봄이 되었다. 서로의 겨울이 서로 인내가 되고, 서로의 봄이 서로의 꽃이 되었다. 산수유나무도 사람처럼 부단한 노력과 자기갱신으로 꽃을 피운다. 그들도 사람처럼 현실과 이상을 향해 고뇌한다. 꽃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믿음으로 힘껏 봄을 밀어올린다.

소라아파트 2층 신혼집에 산수유나무꽃이 화르르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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