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사 석불
용화사 석불
  • 공진희 기자
  • 승인 2020.06.07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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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때 이른 무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코로나 때문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홀로 걸미산 산책로를 걷는다.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는 것은 없다.

선글라스도, 모자도 쓰지 않았다.

새로운 습관으로 자리 잡은 마스크만이 햇빛을 가려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이러한 행색을 보였다면 참 해괴한 사람이라 여겼을 것이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군청 소재지인 읍내 산책로에서 대낮에 나 홀로 산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정자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덕문이 뜰이 홀로 더위를 벗하고 있는 해괴한 사람을 반긴다. 햇빛에 반짝이는 비닐하우스가 녹색으로 출렁이던 어릴 적 기억을 대신하고 있다. 걸미산 동쪽 아래에 진천 용화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 용화사 경내에는 높이가 7.5m에 이르는 대형 석불이 고려시대 조성된 석조 보살입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 이 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1984년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법주사에서 관리한다.

불상이 있던 원래 사찰은 702년(신라 성덕왕 19) 창건되었다.

진천지방 호족세력에 의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천 용화사 석불입상은 양어깨를 덮는 통견 형태의 대의를 착용하고 있다. 옷 주름은 가슴 아래부터 `U'자 형태로 흘러내린다.

불상의 손은 다소 작은 편이다.

양손은 연꽃 가지를 살며시 잡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 위에도 연꽃 봉오리가 조각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불상이 들고 있는 연꽃 봉오리는 용화(龍華)로 여겨지고 있으며 고려시대 불상에서 다수 확인된다.

용화를 들고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은 미륵상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미륵상이 용화인(龍華印)을 결하고 있는 것은 미륵이 도솔천에서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용화삼회의 설법을 하는 것을 `용화'라는 꽃을 통해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진천 용화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대 석불의 한 형태이지만 통일신라 이래 계승되어 온 전통적인 불상 양식의 계보를 잇는 불상으로 분류한다.

진천읍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이 불상에는 전설이 전해 온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 덕문평야에 진을 치고 진천을 향해 진군하려 할 때 진천 쪽에서 육척장신의 대장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금방이라도 자신들의 진지로 뛰어들 것 같아 미리 겁을 먹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왜군이 본 육척장신 대장이 바로 이 불상이다.

용화사 석조보살입상은 송덕불상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진천 출신인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덕을 숭모하는 뜻에서 조성하였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1932년 간행된 `상산지'에는 `미륵석불이 읍의 안산인 걸미산 밖에 있는데 높이가 5장쯤 된다. 옛날에 적병이 덕문이들에 진을 치고 부중으로 들어가려 할 때 키가 5장이나 되는 장군이 위풍늠름하게 버티고 있어 무서워하며 달아났다. 이곳 사람이 나중에 가보니 그것이 걸미산 미륵불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이곳 용화사를 반환점으로 치러진 교내 마라톤 대회에서 친구들과 가뿐 숨을 몰아 쉬던 기억이 새롭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는 석불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생명들이 품격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미래를 열어 가도록 가피를 내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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