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규시인의 북한문학기
김창규시인의 북한문학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5.1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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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만경대 고향집
단출하게 꾸민 '주체의 성지'를 둘러보다

고려 호텔에서 아침을 7시에 먹었다. 25층 2호에서 박용수 시인과 함께 창문을 열고 평양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아파트 건물들이 페인트 칠을 하지 못했지만 산뜻하다.

멀리 대동강 가에 집들이 다정스레 보인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비행기로 정확하게 50분 걸렸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박용수 시인과 필 담을 나누며 오늘의 일정을 말한다. 김일성 주석의 만경대 고향집을 가는 날이다. 오전 8시 50분 고려호텔을 출발하였다. 북측의 김강호, 김용일 선생이 아침 인사를 한다. 간밤 잘 주무셨냐고 그러며 웃는다. 북측의 요원 중에 젊은 층이지만 한 사람은 30중반을 넘었고, 또 한 사람은 40대였다. 보통강 옆의 보통문을 지나 광복거리 10차로가 넘는 거리를 시원스럽게 달린다. 궤도차량이 달리고 버스가 지나가고 자전거를 탄 평양시민이 보인다.

우리가 탄 차 앞에는 안내차량이 앞장을 섰다. 그리고 남북의 대표들이 탄 차가 뒤를 바짝 따른다. 평양의 보통문 설명을 하는 북측 김강호 선생의 얼굴이 밝다. 임진왜란 때도 6·25전쟁 때의 폭격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축물 중 하나라고 소개한다.

창광 거리를 벗어나니 북쪽의 여름 풍경이 전개된다. 시민들이 보통강에서 낚시도 한다. 그리고 남녀가 약간씩 떨어져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들이 보이고 평양의 멋쟁이 여성들도 눈에 띈다. 보통문 앞의 화단에는 여름의 꽃들이 한창이다. 예술 촌, 체육 촌을 지나면서 새로 지은 25∼30층의 신축건물들이 광복거리 양측으로 즐비하다. 곧게 넓게 뻗은 일직선 거리를 달린다. 광복거리에는 포장마차들과 남새상점, 일용품을 파는 상점들이 보였다. 버스가 우측 낮은 구릉 숲이 많은 쪽으로 들어간다. 녹음이 싱싱하다.

김일성 주석이 나고 자란 집

만경대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한쪽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받고 고은, 신경림, 백락청, 송기숙 선생들과 함께 앞장을 섰다.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김진옥(24) 여성이 자신이 안내를 맡았다며 인사를 한다. 너무 예쁘고 어리게 보였다. 김일성 고향집은 몇 만평의 대지가 공원처럼 꾸며져 있고 그 가운데 아주 작은 초가집이 있다. 이 집이 북쪽의 명승지요. 김일성 주석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이다.

집 주위로 큰 살구나무 자라

2001년 6·15 1주년 때, 이 곳에 와서 방명록에 강정구 교수가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을 이루자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자 보수언론들이 남쪽에 이 사실을 알려 좌경, 용공, 빨갱이라는 온갖 욕을 먹었던 장소다. 광복촌 만경대 산지기 집이다. 이 초라한 초가집이 북측의 '어버이 수령님'이라 불리는 김일성 주석의 초가집이다. 지주의 산과 묘가 있던 곳을 지금의 성지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집 주위로 큰 살구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고, 초가집 담은 얕다. 키 큰 미루나무, 수양버들 등이 춤추듯 바람에 흔들린다.

만경대 고향집은 북측이 자랑하고 내세우는 위대하신 수령님의 집이다. 그집을 구경하는 것이 평양 사람들 뿐만 아니라 북측의 인민 모두가 바라는 소망이라고 안내하는 여성이 말해주었다. 항일운동을 하신 김일성 장군께서 어린시절 이곳에서 자라 큰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명을 장황하게 하였다.

주변에 심어진 상록수 조경이 너무 아름답다. 현충사 이순신 장군이 모셔진 사당을 어릴 때 청주에서 자전거를 타고 아산 현충사를 방문했던 추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친구들과 현충사를 방문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오늘은 문학을 하면서 동인으로 동지로 만난 대구와 청주의 시인들이 멋지게 김일성 주석 고향집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었다. 김승환, 김창규, 배창환, 도종환, 김용락 등과 고향집을 등진 채 사진 촬영을 하였다. 뒤에는 은행나무가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다. 고향집 지붕 위에는 박 넝쿨이 싱싱하게 올라가 앉아 있다.

분단시대 동인들이 최초로 평양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분단시대 동인은 배창환·김종인 시인 등과 청주의 도종환 김창규가 1983년도에 만든 문학동인이다. 분단시대 동인들은 문학을 통하여 민주화를 이룩하고 통일의 길을 가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동인이다. 대구와 청주를 매번 기차를 타고 왕래하면서 추풍령을 넘고 낙동강을 건너다니며 민족을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말하며 저항의 문학을 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이 모임이 주체가 되어 대구·경북 작가회의를 건설하였고, 청주에서는 민예총과 충북작가회의를 창립했다. 동인지에서 각각의 문학지를 발간했다. 대구에서는 '사람의 문학' 청주에서는 '청주문학'이 발간되었고, 후에 '충북작가'지로 발전했다. 실제 우리는 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실천적 삶을 살았다. 데모도 참 열심히 하였는데 광주학살진상 규명, 전두환 노태우 처단을 외치는 그런 데모였다.

평양을 함께 왔다는 것은 통일도 함께 하자는 깊은 뜻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민족을 그야말로 사랑하고 아끼며 변치말고 통일의 길을 가자는 맹세일 것이다. 실제 우리는 남쪽에서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을 갔다왔고, 교육민주화 운동을 하다 학교에서 추방당했다.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평양, 백두산, 묘향산을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분단시대 동인들의 의미 있는 평양 방문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남쪽에서 환영받지 못할 일들을 한 우리들이지만 남북의 교류에 일조하고 통일의 물꼬를 트는데 한몫 하자는 것이 방문의 목적인 것이다. 남북의 문인들이 실로 60년만에 만나게 된 상봉의 자리, 양측의 문인들이 평양, 묘향산, 삼지연,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5박 6일 일정의 뜨거운 만남을 이루게 된다. 어찌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있으랴. 백두산 천지에서 일출 시간에 맞춰 '통일문학의 새벽'을 여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게 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가난했던 우리의 삶 떠올라

고향집 지붕위에 고추를 널어 말리거나 호박고지를 말리던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마당에는 멍석을 펴고 밤하늘 별들을 바라보며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던 시절이 그립다. 오늘 김일성 주석의 고향집을 방문하면서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았던 우리네 삶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본군대의 한반도 점령시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사나이로서 무장 투쟁을 하는데 가담하여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웠을 것이다.

고향집에 다니러 온 사람들처럼 그 곳 우물물도 마시고, 그 곳에 얽힌 일화들도 들으며 아침 시간을 보냈다. 김일성 고향집을 떠나오면서 이 곳이 왜 명소가 되었는지 설명이 필요 없다. 주체사상이 북측 모든 민중의 머릿속에, 삶의 일상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 김일성 사진이나 동상 앞에서 갖추는 예는 어떤 신보다 더한 받들기였다. 문익환 목사는 1989년 김일성 주석을 직접 면담하는 자리에서 주체사상을 버리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세상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뜻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아들 김정일이 실제 북측의 인민들의 고난과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은 한 시대의 신화로 끝나가고 있다. 지금은 김정일 체제의 선군정치가 발을 붙였다.

남북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평양, 금강산, 백두산 관광이 가능하게 된 세상이 되었다.

머지않아 남북을 잇는 철도가 개통될 것이다. 바야흐로 통일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남북의 철도가 이어지면 시베리아 광활한 벌판을 횡단해 유럽까지 기차가 달리게 될 것이다. 우리민족이 잘 사는 세상이 멀지 않았다. 북쪽이 점진적 개방을 통해서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하여 끼칠 영향력은 막대할 것이다.

김일성 고향집을 방문하면서 이 작은 초가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북쪽을 지도한 위대한 수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버리고 인민을 위해서 살았다는 한 가지 사실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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