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먹으며
사과를 먹으며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9.11.27 2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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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의 시읽는 세상

 

함 민 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마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 사과가 꼬리 기차처럼 이어집니다. 먹는다에서 시작된 꼬리는 햇살과 비, 바람과 눈, 그리고 사과 위를 지나가던 벌레로 옮겨갑니다. 농부의 꿈으로 수확된 사과는 누군가에게 맛으로 기억되지만, 그 맛 속에 담긴 의미는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사과의 긴 여정이기도 합니다. 어디 사과뿐이겠습니까. 각기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고 서로 다른 시계가 작동하지만, 모두가 소중한 우주인 것을 사과 한 알에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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