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제자리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19.11.1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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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들꽃의 향기가 진동을 한다. 서늘하게 퍼져가는 바람이 온 세상을 수수한 꽃동네로 만들어 놓았다. 계절을 매듭 짓는 모습들이 한창이다.

아주 작은 풀 한 포기에서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어 다시 제갈 길로 가고들 있다. 가을의 고갯길은 이처럼 스치기만 해도 예사롭지가 않다. 잠시 숨을 고르듯 사방을 둘러보니 소란했던 세상마저도 가을의 향기에 취한 듯 춤을 추고 있다. 풍요와 함께 새로운 질서가 기다리고 있는 풍경이다.

오고 가는 계절을 얼마나 세어 보았을까. 그리고 나는 어디쯤 다다라서 살고 있는 걸까. 이렇게 때로는 혼자서 묵언의 대화를 꺼내어 들며 생각에 잠긴다. 문득 아득할 것 같은 시공간이 무척이나 가깝게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무겁든 가볍든 자기만의 몫이 지나가며 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편의 손에 수북한 들꽃이 있다. 야외운동을 갔다가 향기를 옮겨오고 싶어서 꺾어 왔나 보다. 말 못할 쑥스러움을 감추듯 내밀고 있다. 미안함과 고마움에 얼른 받아들였다.

꽃의 외향이 소소할지라도 내 집에까지 다다라 가을향기를 퍼트린다는 자체가 또 다른 행복이었다.

넉넉한 그릇에 담아 놓은 후 물도 수시로 갈아주기 시작했다. 코끝을 가까이할수록 그윽한 냄새가 그만일뿐더러 얼굴을 마주하듯 자꾸만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끌어낸다.

며칠은 싱싱한 모습으로 향기까지 짙다. 웬걸, 부스스하게 형체가 낡아지더니 향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남편의 관심이 이어지던 중에 하는 말, 뭐든 제자리에 있지 아니하니 빨리 못쓰게 되는 것 같다며 꽃을 치워 버린다. 꺾어온 미안함이 동반되어 있는 듯한 음색이다.

만일 제자리에 두었더라면 아직도 싱싱하게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향기 뿜기에 한참이었을 텐데, 하는 짐작으로 들려왔다. 그 소리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제자리란 말이 새삼스러웠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제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했다.

정리정돈도 필수이지만 무엇보다도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삶에 유익한 일인지 둘러본다.

내 경우 가장 먼저 가족의 구성원이 떠오른다. 살아가는데 근본적인 관계망을 형성해주고 그 안에서 이어지는 현실들이 지금껏 나를 안정되게 하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이 단순하다 할지라도 그 점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그리고 내가 감당할 역할로 인해 이어지는 삶의 질서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육체가 분리되어 살아갈지라도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는 하나여야 했다. 때로는 갈등이 무리지어 와서 혼란에 빠진 적도 많았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친들 그 어딘가에 귀속된, 자유가 한정된 유익한 포로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벗어날 수 없었던 내 자리였다. 나 혼자만의 안위를 위해 살기 고집했다면 과연 지금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각기 다른 모양과 생각들로 살고 지며 흘러간다.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다.

소소한 들꽃도 제자리에 있을 때 향기가 더욱 짙고 생명이 오래가듯이 우리의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더 큰 공동체 안에서 질서를 지키며 제 몫을 감당해갈 때 평화가 지속되리라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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