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수능’과 통섭의 사회
‘불수능’과 통섭의 사회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11.20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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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구는 무한히 작은 부피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부피 요소들이 빈틈없이 한 겹으로 배열되어 구 껍질을 이루고, 그런 구 껍질들이 구의 중심 O 주위에 반지름을 달리하며 양파처럼 겹겹이 싸여 구를 이룬다. 이때 부피 요소는 그것의 부피와 밀도를 곱한 값을 질량으로 갖는 질점으로 볼 수 있다.

(1) 같은 밀도의 부피 요소들이 하나의 구 껍질을 구성하면, 이 부피 요소들이 구 외부의 질점 P를 당기는 만유인력들의 총합은, 그 구 껍질과 동일한 질량을 갖는 질점이 그 구 껍질의 중심 O에서 P를 당기는 만유인력과 같다.

(2) (1)에서 구 껍질들이 구를 구성할 때, 그 동심의 구 껍질들이 P를 당기는 만유인력의 총합은, 그 구의 동일한 질량을 갖는 질점이 그 구의 중심 O에서 P를 당기는 만유인력과 같다.

(1), (2)에 의하면, 밀도가 균질하거나 구 대칭인 구를 구성하는 부피 요소들이 P를 당기는 만유인력의 총합은, 그 구와 동일한 질량을 갖는 질점이 그 구의 중심 O에서 P를 당기는 만유인력과 같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문장들이다. 수험생과 그 가족, 심지어 사회 전반에 작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준 올해 수능 문제인데, 이런 과학적 문장은 국어 시험 31번 문제로 출제되었다. 이 해괴한 문제는 그림이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역시 긴 문장으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객관식 선택지가 있으므로, 이 모든 전문과 그 앞의 지문까지 살펴보아야 정답을 찾을 수 있다. 아니, 만유인력에 대한 지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 선택지만 읽어 보아도 정답을 찾을 수 있다는 입시전문가들의 풀이도 있다.

과학에도 이야기는 반드시 있다. `불수능'이라는 아우성을 만든 올해 수능 국어 31번 문제의 핵심 이론인 <만유인력>은 `질량을 가진 두 물체 사이에는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이 작용하고, 이 힘은 두 물체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달과 지구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중력)은 달(m)과 지구(M)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r)의 제곱에 반비례한다.<신우철. 친절한 과학사전>'로 정의된다. 역시 어렵다. 그러나 그 정의는 「뉴턴의 사과」를 통해 아주 쉽게,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다.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사과열매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실마리를 풀었다는 이야기는, 사람이 넘어지지 않고 지구 위에 서 있음과 조수 간만의 차이 등 실생활과 밀접하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1918~1988)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손꼽힌다. 양자역학과 아원자입자의 행동 등 파인만의 과학적 연구는 어렵다. 그러나 파인만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요>같은 과학의 대중적 저작물을 통해 어려운 물리학의 세계에 대한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수능 국어시험에 문과의 기피 대상인 과학 분야의 문제가 출제되었다는 점은 분명 파격이다. 문학적 요소에 제한적이었던 그동안의 관행을 초월했다는 점이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공분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이론적 표현의 수단이 글을 통해 이루어지고, 학문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소위 통섭의 시대를 감안하면 충분히 공감이 되는 시도로 충분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너무 치밀한 경계와 독과점의 세계에 안주해 있다. 통섭을 거부하고, 전문 영역에 이르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일부러 어려운 말을 늘어놓으며 닫힌 세계의 껍질을 갈수록 두텁게 하고 있다. 나는 해마다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 문제가 공개되면 재미삼아 풀어본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오답이 높아지는 처지를 확인하면서 기억의 상실과 집중력의 결여를 실감한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는다. 기억이 가물거리는 만큼 새로운 기억을 담으면 되고, 내가 발휘해야 할 집중력은 그때그때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독재정권일수록 수능의 난이도를 낮추면서 혹세무민과 대중의 우민화를 시도했다는 음모의 설을 믿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설마 일부러 어렵게 출제했겠는가. `사람이 먼저'인 이런 정부에서…

그래도 국어 31번 문제는 너무 어렵다. 역시 시험은 평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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