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만추(晩秋)
  • 류충옥 수필가·청주 성화초 행정실장
  • 승인 2018.11.1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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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류충옥 수필가·청주 성화초 행정실장
류충옥 수필가·청주 성화초 행정실장

 

추수를 끝낸 들녘이 휑하니 허전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누렇게 익은 황금 벼들이 만삭의 몸을 이기지 못하여 고개를 숙이고 일 년 동안 길러준 땅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추수 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부들의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열매들은 하나 둘 거둬들여 지고, 빈 대공이나 실속 없는 나뭇잎들만 버려진 채 점차 바싹 말라간다. 텅 비었던 곳간이 조금씩 채워질수록 들판은 점점 바닥을 드러낸다. 찬 서리까지 내려 긴 밤 동안 허옇게 냉기를 뒤집어쓴 대지는 아침 해가 떠오르면 눈물이 맺힐 것이다.
빈 들판을 보노라면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팔십 평생을 치열하게 사셨다. 열매인 자식들이 모두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키워 내신 후 된서리 맞으시고 요양원에 누워계신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으시며 부지런하시던 어머니다. 논밭 농사만으론 육 남매 자식 농사가 어려워서 봄가을로 누에를 치셨다. 낮에는 뽕잎을 따오고 밤에는 누에똥을 가려내어 깨끗이 해주고 뽕잎을 썰어서 두 개의 방에 몇 단으로 쌓은 누에들에게 먹이느라 밤잠도 거르기 일쑤셨다. 머릿속엔 온통 일거리로 가득하여 언제 무슨 일을 해야 할지가 프로그램처럼 짜져 있어서 남들처럼 훌훌 털고 여행 한 번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셨다. 그러다 좀 편해질까 싶으니 병마가 찾아와 덜컥 발목을 붙잡혔다. 뇌졸중이 와서 온몸이 마비되고 언어를 잃으셨어도 각고의 노력 끝에 집 안에서 기어서라도 다니셨는데, 이제는 입으로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자식조차 점차 몰라보는 듯 허공을 응시하며 무표정이다.
부모님 세대는 1930년대에 태어나셔서 일제강점기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서러움을 고스란히 받으시고 6·25 동란 속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성장하셨다. 후진국의 서러움과 배고픔을 자식들에게만큼은 물려주지 말아야겠다는 신념으로 허리띠 졸라매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직 경제성장에만 몰두하며 사셨던 분들이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살아내는 잡초처럼 한평생을 버텨 오시고, 각고의 노력 끝에 가장 단기간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게 해 주신 분들이다. 어떤 분은 징용으로 끌려가고, 어떤 분은 위안부로 끌려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나라 잃은 서러움에 치를 떠셨던 분들이 이제는 연로하셔서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꺼져가고 계신다.
이분들의 희생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분들에게 받은 은혜를 모두 갚을 길은 없지만, 조금이나마 보답을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인생 정리기에 계신 이 땅의 부모님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큰돈이나 재물은 아닐 것이다. 단지 고생을 알아주고 억울함에 함께 분노하며 힘을 실어 드리는 것.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위안부 보상 문제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에 아직도 반기를 들고 있는 일본 아베 정부에게 온 국민이 일침을 가하여 부모님 세대의 한을 풀어 드리는 것 또한 남아있는 세대의 임무가 아닐까 싶다.
봉사단체 활동으로 독거노인을 방문하면 외로운데 사람 소리가 나서 좋다고 반기시며 요즘 세대를 부러워하신다. 이분들 덕분에 편리하고 부유한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날씨가 추워진다. 오늘은 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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