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론
충청시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3.13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순국 69주기 안창호 선생을 기리며…
김 동 진 <대한적십자사 충북도지사 사무국장>

지난 10일 도산 선생께서 순국하신 지 69주기가 되는 날이다.

민족사의 암흑기에 큰 빛을 발한 겨레의 지도자요, 위대한 선각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고난의 인생을 바쳐 열성으로 사랑하고, 염원하던 조국 독립을 못 보고 순국한지 어느덧 69돌.

오늘 우리는 선생의 거룩한 뜻을 되새기며, 우리들의 사명과 책임이 무엇인지 깨닫고자 한다.

도산은 6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고 갔으나, 그가 남긴 업적과 나라사랑의 정신은 오늘도 맥맥히 살아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고 있다.

일찍이 도산 선생의 측근에서 사랑 받았던 우리고장 출신인 금아 피천득 선생은 현재 98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기회가 닿는 대로 도산을 추모하며 후생들에게 생전의 모습을 권하는 전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숭고하다기보다는 너무나 친근감을 주고 근엄하다기에는 너무 인자하였으며, 그의 인격은 위엄으로 억압하지 않고 정성으로 나를 품안에 안아버렸다. 연단에 서신 우아한 풍채, 우렁차면서 날카롭지 않고, 청아하면서 부드러운 음성, 거기에 자연스런 몸가짐. 선생은 타고난 웅변가이셨다. 비록 사람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목소리를 예찬하나, 선생의 목소리만은 못하였다. 그는 위대하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스러운 데가 하나도 없었다. 거짓말이나 권모술수도 쓰지 않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1902년 24세 때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갔을 때 그곳에 정착해 생활하던 한인들이 미개한 풍습 형태로 서로 싸우는 것을 바로 인도하기 위해 조직한 친목회를 공익협회로 발전시켰으며, 그때부터 국내·외를 넘나들며 민족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55세 때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주로 미국과 상해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선생께서 조직하고 지도한 운동단체로는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태극서관, 신민회, 흥사단 등이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초창기에도 중심적 역할을 다하였다.

도산과 같은 위대한 인물의 정신과 사상을 간단히 표현해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우나 '참되자, 일하자, 사랑하자'이 세 가지를 인생의 기본으로 강조하고 실천하였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변란과 시련의 악조건 속에서도 많은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국력을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서로 화합하고 갈등을 해소시키며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회적 염원을 뒤로하고, 정치적·종교적으로 또는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면서 노블리즈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불신과 지역갈등이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의 세태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며, 우리 민족이 높은 가치로 생존, 발전하는 방도는 무엇인지 고민해 볼 때다.

지난 1924년 북경에서 저 유명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통해 "묻노니 오늘 대한의 주인되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 지도자로 바로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서로 합동하며 협력해야 하는 때를 맞아 우리는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돌이켜 보자.

도산 선생의 위대한 꿈은 단순하게 독립운동에만 있지 않고 우리 민족을 세계에서 존경받는 민족으로 만들고 우리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만드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국가사회의 일꾼을 기르는 데 심혈을 기울이다 끝내 그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두 차례의 옥고 끝에 민족의 광복을 7년 앞둔 지난 1938년 3월 10일 순국하였다.

도산은 떠나고 없지만 그의 정신과 사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변함없는 산 교훈으로,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후손된 우리의 책무라고 삼가 추모사로 대신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