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58>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58>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2.2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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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치골 성지
성모 신심 발상지 김대건 신부 순교로 지켜…
▲ 수리치골 성지를 알리는 푯말.  '수리치골' 골짜기마다 신앙의 숨결이 수리치골성지에 도착해 기도장소를 따라 걷다 보면 봄을 재촉하는 알싸한 바람으로 전해지는 맑은 공기가 순례자들을 반긴다. 1846년 11월 성모 성심회 조직 수리치골은 박해시대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살았던 곳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에게 서품을 주고 김대건 신부를 지팡이 삼아 한국에 입국한 페레올 고 주교와 성 다블뤼 안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고 안장될 무렵인 1846년 11월 2일, 박해받는 한국교회와 민족을 위해 성모 성심께 한국과 한국 교회를 봉헌하고 '성모 성심회'를 조직한 성모성심 신심 발상지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의미 깊은 사적지이다. 성모 성심 수도회는 원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로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즈네트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하권)에서 수리치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경당이 없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외딴 곳에 열심한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 4일 뒤 선교사들은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데즈네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수리치골에 이렇게 세운 작은 신도회를 그의 명부에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 후 다블뤼 안 주교가 쓴 편지에서는 성모 성심회가 기도하고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듣는 감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일날에 성모 성심회의 교우들이 조선말로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감동되고 상쾌하여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각각 그 나라말로 성모를 찬미하고 죄인을 회두케 하시는 은혜를 갈구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인자하신 성모 마리아여, 많은 지방에 허다한 은혜를 베풀어 주심과 같이 우리 지방에도 베풀어 주실지어다." 현재 수리치골에는 미리내 천주 성삼 수도회의 수련원이 설치돼 있다. 수리치골을 찾는 이들은 32번 국도에서 갈라져 약 3.4지점에 있는 이정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옛 교우촌 자리에는 게세마니동산이 꾸며져 있고 여기에는 야외 제대가 마련돼 있다. ▲ 입구에서 바라본 수리치골성지.

성지에 도착해 피정집에 들린 후 기도장소로 올라가다 보면 수녀원 입구 좌측으로 탁 트인, 마치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이 광장에 천주성삼상과 승리의 성모상이 있다. 광장에서는 야외미사를 볼 수 있으며, 광장에 놓인 제대는 고 페레올 주교님의 관 두껑으로 제작된 것으로 수리치골과 우리 교회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광장 우측에는 성모성심을 주보로 창립된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가 '성모성심을 통하여 천주성삼께 영광을!'이라는 모토 아래 성지를 가꾸고 있다.

 감추어진 공소·본당의 중심지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했다.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조선 교회가 유지되어 나가고 자신들이 계속 이땅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성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성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한 신입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와 선교사들이 이 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주일마다 신자 몇 명이 이 곳에 와서 하느님의 어머니 성화 앞에서 몇 가지 기도문을 외우기로 결정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후 신자들은 이곳에 모여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었다고 전해전다.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로 오르던 길을 묵상할 수 있는 14기도처.

수리치골은 공주~유구 간 국도의 중간지점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야만 하며, 국사봉을 뒤로하고 있는 막다른 골짜기의 궁벽한 곳이다. 옛 수리치골 교우촌은 미리내 '성모 성심 수도회'가 1984년에 정식 인가를 받은 뒤 오랜 답사 끝에 찾아내게 되었다. 그런 다음 수도회에서는 이 곳에 '성모 성심 수도회 분원'을 건립하였다.

국사봉 너머 둠벙이 교우촌 자리

한편, 국사봉 너머 북쪽으로는 또 하나의 유서 깊은 교우촌 '둠벙이'(공주시 신하면 조평리)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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