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주택가 주변을 잠깐 걷다가 `루바토'라는 이름을 단 피아노 음악학원 간판을 지나치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안주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에서 피아노 관련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 애를 쓰는 어느 중견 연주자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우는 친구들을 많이 부러워하셨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던 그는 재능이 있어도 전공을 시키진 않겠다는 부모님의 뜻과는 다르게, 초등학교 때 혼자 악보를 연주하다가 베토벤 음악에 감동을 하여 전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했더군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피아니스트가 안 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그 꿈에 대해 어머니께 처음 말씀드렸을 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때 제가 어머니께 서울에서 자란 또래 친구들보다 10년 더 늦게 되더라도 꼭 꿈을 이루고 말겠다고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음악가가 되겠다는 확신과 열정이 그때부터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고향인 청주에는 피아노 전문 연주자가 없었습니다. 피아노 연주회도 보기 힘들었기에, 그때부터 서울처럼 클래식 연주자들이 모자라지 않는 교육여건을 고향에도 갖추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습니다. 나중에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 고향에서 음악가의 꿈을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일찍 품었어요.”
독일 유학 시절 그는 “그래, 음악에 대한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10년 동안 피아노 관련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무려 6개의 대학 학적부에 이름을 올렸고, 전공으로 피아노와 음악교육학과 반주와 음악코치 등을 다루었습니다. 매주 90시간 이상 연습과 공부를 했고, 겨울방학엔 피아노 연습 기록을 세운다며 매일 12시간에서 15시간씩 달려들다가 쓰러지기도 했던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는군요.
10대 때는 쇼팽, 20대 초중반에는 슈만, 20대 후반부터는 폴랑, 메시앙, 쇼스타코비치, 스크라빈, 프로코피예프 등에 빠져 살았던 그는 피아졸라의 탱고까지도 가까이하면서, 음악이라는 바다로 통하는 길은 연주자마다 다른 생각과 개성으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무수히 많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연주한다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를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본다는 그는 요즘 `디 솔리(Di Soli)'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데, 지난달 25일엔 슈만의 `피아노 4중주 작품번호 47번(Piano Quartet in E major Op.47)'을 무대에 올려 연주자들의 표정과 호흡을 함께할 수 있는 실내악의 묘미를 맛보게 했습니다. 3악장의 서정적인 선율은 백미(白眉)였지요.
“음악이 제겐 전부인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은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느라 학생 때처럼 100퍼센트 연습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제자들을 볼 때 정말 기쁩니다. 제 삶이 포르테(forte, 강하게)였다가 스포르잔도(sforzando, 하나의 음표 또는 화음에 돌연히 악센트를 붙여서)로, 그다음엔 아파쇼나토(appassionato, 열정적으로)로 진행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루바토(rubato)'라는 말 앞엔 `템포(tempo)'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음(Daum) 백과사전에 따르면 “연주자가 특정 박(拍)이나 마디, 악구(樂句) 등을 길게 늘이거나 당김으로써 리듬을 미묘하게 변화시키는 기법”을 루바토라고 하는데, 피아니스트 전다미의 행복한 루바토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에세이스트
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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