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설계도
가장 중요한 설계도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12.0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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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과수원 양지쪽에 목조주택을 짓기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치밀한 설계 덕분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일이 진행 되고 있다.

음성으로 온 후 다섯 번이나 이사를 했다. 처음의 거처를 아파트로 정할 때는 곧바로 과수원에 집을 짓고 정착할 줄 알았다. 과수원을 설계할 때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집이 앉을 자리였다. 유명한 풍수지리사인 동창 친구는 가섭산의 정기가 흐르는 줄기에 수맥이 흐르지 않으며 가장 양지바른 자리를 찾아 집터로 정해 주었다. 게다가 저만치 오른편에 문필봉까지 있어 내가 글쟁이로서 우뚝해질 자리라는 덕담까지 해 주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잘 안 되는 것이 인간사 아니던가. 2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며 11년이나 유랑생활을 한 끝에야 이제 겨우 실행 중이다. 큰딸 내외도 나란히 집을 짓고 있으니 더 큰 기쁨이다. 과수원이 바로 내 손녀들의 고향이 된다는 사실은 내게 또 하나의 큰 의미다.

고향…. 나지막한 산이 감싸 안은 해질 무렵 내 고향에는 동그란 초가지붕 굴뚝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삶이 힘들 때 추억의 창고에서 그 고즈넉한 풍경 하나 꺼내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던 기억. 거기에는 부모형제 대가족의 떠들썩함이 있고 친구와 오빠 언니와 민물고기를 잡던 기억도 있었다. 깊은 밤 잠결에 듣던 칙칙폭폭 기차 소리…. 이 얼마나 든든한 재산인가. 내게 있는 포근한 고향 이미지를 내 손녀 서연이와 따숨이도 갖게 될 것이다. 계절과 시각에 따라 다른 빛깔로 한 장면씩 그 조그만 가슴에 저장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절로 뿌듯해지는 것이다.

집짓기 시작한 지는 한 달 남짓이지만 준비는 지난 겨울부터 했다. 포도나무를 자르고 측량을 하고 흙을 넣는 등의 내가 맡은 물리적인 일은 그냥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지을 것인가였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작은딸 식구와 내가 함께 살 집의 평면도. 한 지붕 두 가족의 사생활이 보장되고 농사꾼이 살기에 적합한 평면도가 나와야 했다. 과수원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외관도 중요했다.

바쁜 일상에서도 아이들은 시간을 내 건축박람회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 관련 책을 사서 공부했다. 틈만 나면 둘러앉아 평면도와 입면도를 그려보고 하다못해 가구의 크기와 놓을 자리, 콘센트 위치나 구멍 숫자까지 계산했다. 준비 기간 내내 두 딸과 사위가 하는 양을 바라보는 것이 나는 적잖게 흐뭇했다. 느낌이나 막연한 믿음에 따라 결정해버린 뒤 그것이 잘못되어 헤어나는데 세월을 보낸 어미와는 다른 점이 대견해서다.

집 설계 때 고민하던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 걸음 더 욕심 내 본다. 아직은 신혼이라 깨소금 냄새 솔솔 풍기며 사는 두 딸과 내 사위, 맞잡은 손 놓지 않고 먼 길 잘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설계도를 위해서도 많이 고민하기를. 그리하여 중년을 슬기롭게 잘 살고 노년도 진심으로 의지 되는 부부로 잘 남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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