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쓴 시(詩)
몸으로 쓴 시(詩)
  • 이은희<수필가>
  • 승인 2016.11.2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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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은희

겨울을 맞느라 산중과 도시는 수선수선하다. 계절은 소리 없이 바통을 이어받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낮은 산까지 뒤척이며 내려온 단풍을 바라보다 참다못한 사람들은 산중으로 들어간다. 조락의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도로 위에서 시간을 죽여도 기꺼이 감수한다. 낙엽이 나무 발치에 수북이 쌓이면, 집집마다 너나없이 김장 날을 잡는다. 바야흐로 겨울이다.

김장이 끝나면 몰려올 동장군도 무섭지 않다는 생전에 당신의 말씀이 떠오른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기와집 앞마당에 펼쳐진 김장을 하는 풍경과 유년시절의 풍성했던 기억을 되살린다. 울타리에 미루나무 두 그루가 말쑥하게 서 있고, 장독대의 항아리들은 사철 윤기가 잘잘 흐른다. 수돗가 펌프 옆 커다란 `고무다라'에는 소금에 절인 배추가 산처럼 쌓여 무너질 것 같다. 앞마당과 부엌으로 다사분주히 움직이는 어머니와 배춧속을 넣는 아주머니들의 환한 모습이 어른거린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풍경이다. 동네 어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품앗이로 이웃집을 돌아가며 김장을 돕는다. 소금에 절인 배추를 씻으며 아주머니의 걸쭉한 수다로 동네는 조용한 날이 없다. 배춧속을 채우며 동안 못다 푼 감정도 풀고, 누구네 험담도 함께 쓱쓱 버무린다. 동네는 김장 축제로 살뜰한 정(情)을 쌓느라 흥겹다.

`어머니에게 겨울 배추는 詩다'라는 정일근 시인의 시(詩)를 음미하다 그만 그리운 감정이 복받친다. 이틀 전에도 돌아가신 어머님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우울했는데, 마침 지인에게서 어머니의 삶과 꼭 닮은 시(詩)를 배달 받은 것이다. 누구도 어머니, 당신에게 배추를 일구라고 일부러 시킨 일이 없다. 당신은 몸소 식구들의 겨울 양식을 위하여 어린 모종을 심어 속이 꽉 찬 배추를 수확하기까지 `손등 갈라지는 노역의 시간'을 겪어낸 것이다.

어머니가 온몸으로 쓰신 시(詩)를 아니 당신의 삶을 누구도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다. 사람이 읽지 않는 시(詩)를 `자연의 친구가 읽고 간다'는 시어에 읽지 않는 사람이 나인 양 움찔한다. 자식은 텃밭에 심은 배추가 저절로 배춧속 포기를 늘리고, 김장도 저절로 되는 줄 알고 있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게 어디 있던가. 어머니는 험난한 시대를 건너가느라 그 힘겨움을 혼자 삭히고자, 밭고랑에 앉아 자연의 친구에게 속 얘기를 부려놓았는가 보다.

“어머니의 배추”란 시를 만나기 전까지 당신이 애써 지은 `몸으로 쓴 시'로 내가 성장했다는 걸 미처 몰랐다. 겨우내 자식들의 주전부리로 그 시(詩)를, 김장독을 다 비운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겨울 깊은 밤 어머니는 속이 헛헛하고 `굴품'한 것을 어찌 알고, 방금 구운 군고구마에 살짝 언 동치미와 김장배추를 김칫독에서 꺼내온다. 자매들이 따스한 아랫목에 모여앉아 즐기던 군고구마와 김치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그 시절엔 엄동설한도 두렵지 않았고, 마음만은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신혼 초 맞벌이하느라 애쓴다고 김치를 담가 보내주시던 당신의 마음과 손맛이 새록새록 사무친다.

오늘의 시(詩)맛은 약간 맵고 칼칼하다. 김장배추에 어머니의 깊은 사랑과 삶의 애환이 느껴져서인가 보다. 당신이 담근 김치를 김이 오르는 따스한 흰밥에 올려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싶은 날이다. 그러면 절로 행복감이 밀려올 듯싶다. 불러도 대답 없는 어머니, 당신의 이름을 목 놓아 불러본다. 어머니의 특유한 손맛이 눈물이 나도록 그리운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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