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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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2.2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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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와 자유
오 희 진 <환경과 생명 지키는 교사모임 회장>

등나무 쉼터에 앉아 등나무 줄기를 본다. 사방 기둥을 감아 올라 천정에 가득 뻗어 얼기설기 이룬 등나무 지붕은 하늘을 조각내어도 그 푸름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다. 여름날 두터운 덩굴 지붕은 뙤악볕을 막고 초록 수풀을 이룸에 이 쉼터는 사랑 받았음을 기억한다.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아 뻗는 성질이 있다. 반면에 칡덩굴은 왼쪽으로 감아 오르는 성질이 있다. 이 둘을 그대로 두면 서로 먼저 감아 올라가려고 하다가 뒤얽혀버린다고 하여 서로 입장이 달라 적대시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상태를 갈등이라 부른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갈등인 것은 그것이 자연스런 성질의 발현이기에 인간의 갈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늘 인간의 처세가 경쟁과 갈등으로 대립하고 최악의 전쟁으로 치닫는 것은 다른 성질의 뒤엉킴이라기보다 진실을 대하는 태도에 그 잘못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검은 것과 흰 것을 두고 차별적으로 대하는 데에서. 생겨나며 그 차별은 서로 보듬는 대신 남을 미워하고 해침으로써 세상의 큰 해로움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층민 출신 목수 노동자로서 공자와 어깨를 겨룬 묵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여기 어떤 사람이 검은 것을 몇 번 보고는 검다고 하다가 검은 것을 많이 보고 희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검은 것과 흰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작은 잘못을 하면 그것을 알고 비난하면서 남의 나라에 대한 공격은 큰 잘못인 줄 모르고 칭송하며 의롭다고 한다면. 이를 보고 어찌 의와 불의를 분별할 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면. 천하의 군자들이 의와 불의의 분별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천하의 군자들이란 오늘날 이른바 관용적 자유주의자라 자처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언론권력을 갖는 이들을 말하리라. 이들의 관용에서 가장 웃기는 점은 그 속에서 계급 구분이 드러나는 방식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의 관용은 자신에게 유효한 타자에 대한 관용일 뿐이다. 그들은 '특정한 믿음을 근본주의적이라고 부정하면서도 원칙적으로 믿음의 권리를 인정한다고 말한다.'(지젝) 이런 혼란은 묵자의 결론에 따르면 모두 서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진실과 당파성. 어떤 입장을 표명하는 자세는 서로에게 배타적이지 않을 뿐더러 서로를 위한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진실의 정치학'이 그들의 뇌에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들려줄 말은 유가를 비난하면서도 공자를 인용하는 이유를 묻는 데 대한 묵자의 대답 속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 "내가 인용하는 것은 공자의 말 가운데 합리적이고 바꿀 수 없는 말이다. 새들은 땅이 뜨거우면 높이 날고. 물고기는 수면이 뜨거우면 아래로 잠기는데. 이러한 것은 우왕이나 탕왕이라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이치이다."

섣달그믐께 아침. 깊은 안갯속에 진행하는 모든 것들이 갇히고 붉은 해마저 하얀 포박이 두려워 밖에서 기웃대고 있는 모양을 목격한다. 그 상황은 바로 알코올 없는 최신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무늬만 남은 자유 가운데 팽개쳐진 현실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유는 넘실대도 오히려 그 안에서 숨통이 막히는 이 역설의 자유는 내일이면 새해를 맞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희망을 불어넣고 사랑. 그 혁명적 실천에 반드시 이르게 할 것이다. "이방인이여. 들어보라. 어둠 속에서 오색찬란한 유령 하나가 날아다닌다. 유령은 날개를 퍼덕이며 침울한 군중들 위로 비상한다. 그것은 '희망'. 희망. 희망! 희망!"(투란도트) 등나무 성긴 자유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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