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축제
마지막 축제
  • 김희숙<수필가·원봉초 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6.09.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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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친구 아버지의 부음이 문자로 날아들었다. 삼총사 모임 2총의 아버지다. 전주에 있는 장례식장이었다. 오랜 투병 끝에 삶의 옷을 벗으시는 터라 뜻밖의 소식은 아니었다. 병원 생활을 하시는 동안 몇 차례 병문안을 했었다. 말은 못하고 내 손을 꼬옥 쥐시며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던 모습이 선하다.

1총이 어떻게 갈 거냐고 물어왔다. 1총은 자기는 장거리 운전을 못한다며 내게 차를 끌고 가라 한다. 나도 요즘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터라 장거리 불안증이 생겼다. 결국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가는 버스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오는 차편이 없었다. 전주에서 청주로 돌아오는 막차는 19시 반이다. 퇴근 후 출발을 하기에 그 버스는 도저히 타고 올 수가 없다. 기차 시간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22시 25분 전주역에서 오송까지 오는 기차가 있었다. 돌아올 때는 기차를 이용해 오송으로 와서 또 택시를 타고 청주로 오기로 합의를 하고 길을 나섰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영정 사진 속에서 망자(亡者)가 함박웃음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아랫도리가 잘린 꽃들이 사진 주변을 즐비하게 장식하고 있었고, 꽃에 묻힌 망자는 액자에 갇혀 시간을 잊은 듯 말끔한 모습이었다. 이승에서 아픔 속에 묻혀 고통스러웠을 그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딴 세상으로 가면서도 이승에 두고 가는 자식들이 걱정되셨는지 며칠 동안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힘들게 숨을 놓으셨다고 한다.

식당에는 조문객들이 빼곡하게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2총이 초췌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경황이 없었는지 분홍 머리끈으로 묶은 머리가 이리저리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내 머리를 동여매고 있는 검은 머리끈을 빼 2총의 머리를 질끈 묶어 주었다. 2총이 아픈 듯 입을 열었다. 어릴 적 자신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 잔칫날인 줄 알았다고. 그런데 지금은 온몸을 칼로 저미는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잔치가 맞다고. 죽음도 삶의 과정이라고. 비록 다른 생으로 편입하셨지만, 이생의 과업을 다 치르시고 잘 갈무리 하셨으니 잔치를 치러 드리는 건 당연한 거라고. 너무 비통해 말라고.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고. 모퉁이는 돌기 전까지가 늘 두려운 법이라고. 막상 돌고 나면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거라고. 틈나는 대로 음식도 챙겨 먹고 짬짬이 쪽잠도 자두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나도 국에 밥을 말았다. 음식이 달다는 칭찬도 잊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치를 하듯 웃고 떠들며 음식을 삼키는 사람들을 보며 망자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망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 많다는 건 행복한 일이리라. 그리고 그들이 맛있게 이야기하며 즐거운 모습으로 망자를 기억해 주길 망자도 바랄 것이리라.

돌아오는 기차역으로 가려 콜택시를 불렀다. 부슬부슬 비마저 내리는 장례식장이라 그런지 주변에 택시가 없다는 택시 회사의 문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난감해하고 있는데 마침 청주에서 차를 몰고 온 퇴직 교장선생님 부부가 계셨다. 우리 넷은 돌아오며 망자를 위한 노래도 부르고 시낭송도 하며 죽음으로 완성되는 인생의 축제를 이야기했다. 어느덧 청주의 캄캄한 자시(子時)가 저만치서 포근히 우리를 맞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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