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년 전 알았던 글쓰기의 어려움
2300년 전 알았던 글쓰기의 어려움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7.26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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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한 할머니가 할머니 세 명을 승용차에 태우고 가다가 교통경찰에게 걸렸다. 왕복 8차로를 시속 20㎣로 달렸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천천히 가세요?” “저기 ‘20’이라고 적혀 있잖아.” “할머니, 그건 제한속도가 아니라 도로 번호예요.” 그런데 다른 세 할머니가 긴장된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 게 이상했다. 운전하는 할머니 말을 듣고 그 이유를 알았다. 할머니 왈 “방금 ‘210’이라고 적힌 도로를 시속 210㎣로 지나왔거든….”

친구가 카톡으로 보내준 이 짧은 이야기에 빵 터졌다. 생각할수록 웃음이 났다. 찌는 날씨를 잠시나마 잊었다. 시원하고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도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을까.

최근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시학’을 읽을 기회를 갖게 됐다. 바로 그가 비극을 정의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처음 거론했다. “비극은 진지하고, 완전하며, 일정한 크기가 있는 행동의 모방이다…이야기가 아닌 극적 연기의 방식을 취해 연민과 두려움을 일으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갖게 한다.”

그리스어인 카타르시스는 배설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우리는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가 사라지면서 정신적 안정을 찾는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그는 이야기가 사람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려면 플롯을 잘 짜야 한다고 강조한다.

“플롯은 행동의 모방이고 사건들의 배치다.” 행동의 모방은 ‘있을 법한 사건의 재현’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그 사건이 저절로, 우연히 일어나선 안 되고, 인과법칙에 따라 일어나야 한다. 또 이야기는 처음·중간·끝이 나뉘어 기억 속에 담을 수 있는 적당한 크기를 갖고 전개돼야 한다. 이럴 때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스웨덴 영화 ‘오베라는 남자’를 봤다. 주인공 오베는 6개월 전 사랑하는 부인을 잃고, 43년 다닌 직장서도 쫓겨났다. 오베는 자살을 결심한다. 집에서 목을 매려는 순간, 옆집에 이사 오는 젊은 부부의 운전 실수가 자살을 막았다.

자동차 배출가스로 질식사를 시도한다. 이번에도 옆집 부인의 방문으로 실패한다. 동네에서 괴팍한 노인 취급을 받던 오베에게 어느 순간 부인은 살가운 이웃으로 다가왔다. 오베는 그녀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고 어린 자매도 돌봐준다. 꼬장꼬장한 동네 노인에서 인정 많은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2300년 전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의 각각의 부분(행동·사건)이 서로 긴밀하게 짜여 전체를 이루어야 하며, 만일 그 중의 하나라도 위치가 바뀌거나 제거되면 전체가 일그러지고 망가지도록 해야만 한다.” 행동이나 사건이 전체 이야기에 유기적으로 작용하도록 플롯을 짜야 한다는 말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베가 동네를 걷다 쓰러진다. “남들보다 심장이 크다”는 진단이 나왔다. 어느 날 오베는 최후를 맞는다. 고독사는 아니었다. 관찰력이 좋은 젊은 이웃이 있었다. 밤새 눈이 왔는데 오전 8시 오베씨 집 눈이 치워지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든 옆집 부인이 잠옷 바람에 뛰어간다. 가지런히 차려입은 오베가 침대에 누워있다. 유언장에 당부했다. “나를 좋아했던 사람만 장례식에 불러라.”

오베의 죽음을 보면서 이상하게 측은함보다 편안함이 들었다. 잘 짜인 플롯에 담긴 에피소드가 관객을 푸근하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반전과 깨달음’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됐는지 굳이 찾을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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