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마을
시가있는마을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2.11 0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 프
조 말 선

수프를 끓일 때 아버지와 엄마와 나는 항상 마주 앉거나 곁에 앉는다. 빙글빙글 냄비를 저으니 아버지와 엄마와 내가 섞인다. 빙글빙글 얼굴들이 섞인다. 빙글빙글 얼굴들이 뭉개진다. 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버지가 돈다. 엄마와 엄마와 엄마가 돈다 나와 나와 내가 돈다. 한 그릇 끈끈한 액체가 되기 위해 나는 돈다. 나는 수차례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수차례 나도 모르게 엄마가 되는 것이다. 혼숙과 혼음의 수프, 농도가 알맞은 수프는 상처내기 쉽다. 아물기 쉽다. 잘 끓여진 수프에서 물집들이 솟아오르고 가라앉는다. 잘 뭉개진 아버지와 엄마와 나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아버지와 엄마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상처인 따뜻한 한 그릇 가족

시집 '둥근 발작'(창비)중에서

<김병기시인의 감상노트>

수프를 끓일 때만 팽이처럼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하여 가족이 서로 껴안고 돌겠는가. 쓰러지지 않기 위하여 위험한 가계를 이루던 피의 응집은 강한 법. 고난이 밀물처럼 드는 정신의 바닷가에서 거세게 저항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도 섞이고, 눈곱만한 씨앗에서 가느다란 손을 내미는 싹에서도 섞이고, 아프리카 정글의 먹이사슬에서도 섞인다. 나도 모르게 끈끈한 생명의 어우러짐과 이어짐을 위하여 돈다. 그러다보면 틈은 메워지면서 내가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된다. 잘 뭉개져서 섞인다는 것은, 내 몸이 무언가를 위한 스며듦이다. 무언가가 내 몸이 되기 위하여 녹는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태어날 때까지 상처 난 가시를 문지르며 하나가 되는 가족은, 오늘도 한 그릇 사랑 안에서 섞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