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선물
아버지의 선물
  • 전현주<수필가>
  • 승인 2016.04.11 18: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전현주

내 시계는 15년째 잠자고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부터 굳이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닐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모바일 기술의 경이로운 발전은 시계를 어두운 서랍 속에 감금하고 말았다. 한때는 나와 함께 온 세상을 쏘다니고, 나의 모든 일에 관여하던 그것을 나는 아주 잊고 지냈다. 절대로 꺼뜨리면 안 되는 귀한 불씨 대접을 받았던 시계가 이제는 심겨질 때를 놓친 씨앗처럼 깊이 잠들어 있다.

지나온 시간의 체감속도는 때때로 천리마를 타고 달려온 것처럼 느껴져 놀라곤 한다. 멈출 수도 뛰어내릴 수도 없는 천리마의 등 위에서 가끔 꿈을 꾼다. 무료하게 평상에 앉아 먼 산 바라보던 열 살 무렵으로 돌아가는 꿈이다.

그 시절에는 놀고 또 놀아도 하루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때는 시간이 지금보다 확실히 느리게 흘렀다.

점심을 먹고 나면 또 다른 하루 같은 오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계바늘이 서버린 것 같아 조바심을 냈다. 열 살인 채로 멈춰 버릴까 봐 늘 걱정이었다.

그럴 때면 어디선가 아버지가 나타나 시계에 밥을 주었다. 아버지는 시계의 유리문을 천천히 열고 그 안에 있던 열쇠 모양의 쇠막대를 시계의 양쪽 볼우물 자리에 있는 구멍에 꽂아 정성껏 돌리셨다. 잔뜩 밥을 먹은 시계의 추는 아까보다 훨씬 빠르고 힘차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학창시절에는 아침마다 등교 준비를 다 마친 후에 맨 마지막으로 시계를 찼다. 늦어서 허둥거리다가 시계를 두고 나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등 뒤에서 “시계!”하고 소리치며 바통처럼 건네주셨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시계를 어디에 풀어놓던지 아침이면 어김없이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매일 조금씩 늦어지는 시간도 다시 정확히 맞춰져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나의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아버지의 선물은 언제나 시계였다. 입학선물, 졸업선물, 취업선물. 우리 내외가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도, 새집으로 이사했을 때도 시계를 보내주셨다.

그러나 매번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처치곤란일 때가 많았다. 중학교 입학선물로 받은 나의 첫 시계는 귀부인들이나 착용할 것 같은 금색의 팔찌모양이었다. 입학식 날 아침에 번쩍이는 금시계를 차고 집을 나선 나는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그것을 풀어 교복주머니에 넣었었다.

어느덧 많이 늙으신 아버지는 이제 손주들에게 시계를 보내주신다. 그리곤 아이들이 그 시계를 잘 차고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 나를 통해 확인하신다. 내가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못하면, 아버지는 이리저리 이유를 캐물으시고는 또 다른 시계를 보내주기 위해 구실을 만드신다. 그럴 때 재빨리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시계모양을 살짝 귀띔해 드려야 한다.

하지만 정말 몰랐다. 아버지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시계를 보내고, 또 그 시계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서툰 사랑표현 방식에는 늘 시계라는 핑곗거리가 필요했다는 것을 어리석은 딸은 이제야 알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쩌면 우리에게 시계가 아닌 시간을 주고 싶으셨는지 모른다.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할 시간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