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한 혜 영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저기 서성댔을
저 남자를 꼭 빼어 닮은 아저씨를 본 적 있다
바지 구겨질까 전전긍긍
쪼그리는 법도 없이 벌을 서던 그 아저씨
흰 바지에 칼주름 빳빳하게 세워 입고
밤만 되면 은하수처럼 환하게 깨어나서
지루박 장단으로 가뿐하게 산동네를 내려갔던
내려가서는 세월 캄캄해지도록 올라올 줄
몰랐던 그 아저씨 청춘 다 구겨졌어도
바지주름만큼은 시퍼렇게 날 세운 채 돌아와서
서성거리던, 늙고 깡말랐던 전봇대를 본 적이 있다
꼭꼭 닫혀버린 본처 마음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 아저씨
물음표로 무겁게 떨어졌던 고개 아래
불콰하게 익어가던 염치없음을 본 적 있다
저기
저 남자처럼 비까지 추적추적 맞으면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퓨즈가 나간 숲' 당선
2004년 <시조월드 문학대상 ><한국 아동문학 창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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