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권 한 장
회수권 한 장
  • 박윤미<충주 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6.03.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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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 박윤미<충주 예성여고 교사>

이사를 하려고 정리하다 햇빛 본지 언제인지 모를 상자 하나를 연다. 파란 회수권 한 장. 190원.

중학교도 걸어다니고 고등학교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니, 회수권을 쓴 것은 대학교에 가서다. 트럭에 책꽂이 하나와 이불을 싣고 도착한 낯선 도시에 혼자 남겨졌을 때의 막막함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새로운 도시는 넓었고 사방으로 뻗어 있는 길은 무한의 거미줄처럼 느껴졌다. 어둔 밤 좁은 자취방에 누우면 무한의 검은 우주 속에 작은 눈물샘 하나만이 점처럼 둥둥 떠다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그대로 나를 위한 제목이었다.

어느 날 하굣길에 버스를 탔는데 내릴 곳을 지나치고 말았다. 주춤하다 다음 정류장에서도 내리지 못했다. 버스는 종착지까지 갔다가 되돌아 다시 여기를 지날 것이다. 계속 앉아있기로 했다.

해지는 창밖만 응시하며 문득문득 이 상황의 명분을 찾으려 애썼다. 곧 시가지와 주택가를 벗어나고 공장지대도 지나고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달린다. 번화한 도시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것이다.

승객이 모두 내리고 기사와 단둘이 남았다. 뜻하지 않게 조금은 두렵고 외로운 이런 여행을 하게 되다니, 낭만적이지 않은가. 가벼운 버스가 불규칙하게 덜컹거렸다. 종착지는 어느 작은 마을 공터, 버스 한 대가 앞 뒤 문을 모두 열고 있었다. 이제 두 대. 이게 전부였다. 내리면 요금을 다시 내라고 할까 봐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두 기사가 저쪽 버스 뒤편에서 담배를 나누며 나를 흘끔거리는 것 같았지만 난 최대한 의연하게 꿋꿋이 앉아 있었다. 가능하면 다른 방향의 먼 곳을 바라보면서. 그 정류장에서 내렸어야 했어, 그다음에라도 내렸어야 했어, 라는 생각을 애써 밀어내면서.

이런 낯선 곳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게 된 것, 급할 건 없지만 기약 없는 시간을 맡겨놔야 하는 것, 무엇보다 저 이상한 아이는 뭐냐 하는 기사의 눈치를 무시해내야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무모하다고 꾸짖을까 아니면 그런 모험심이 이런 낯선 경험을 하게 해주고 있다고 자신을 기특해해야 할까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생각을 굴리며 지루하게 제법 오래 앉아 있었다.

오는 길에서처럼, 돌아오는 길에도 수많은 사람이 타고 오르는 것을 앉아서 모두 지켜보았다. 나는 인기 없는 다큐멘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유일한 사람 같았다. 긴 시간이 지나 드디어 내렸어야 할 그 지점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어두웠고, 익숙한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나를 반겼다.

회수권 한 장과 두 시간. 그 여행의 진짜 이유는 대학생다운 모험심이 아니고 그야말로 회수권 한 장이었다는 것, 내게조차 처음 하는 얘기다. 살면서 이렇게 사소한 하나에 집착하여 결정의 순간을 놓치거나 엉뚱한 결정을 해버리는 일은 수없이 많았다. 약빠르지도 못하고 융통성 없는 나는 많이도 그랬다.

오늘 나는 세상의 정해진 길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겹고 두려웠던 스무 살의 나와 25년 만에 조우한다. 회수권 한 장을 마주하고 스스로 담담히 고백해보니 내 지난날의 가난을 사랑하는 마음이 솟는다. 서툴고 가난한 시간이 어떻게 풍요의 씨앗이 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지금, 그 젊은 날의 어수룩함이 아련히 그립기까지 하다. 3월의 개학과 함께 낯선 세상으로 첫발을 딛는 젊음 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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