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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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1.2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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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라 (修羅)
백 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하략)

※수라:싸움을 일삼는 귀신

싹기도:흥분이 가라앉기도

가제:방금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산초당)중에서

<김병기시인의 감상노트>

방안에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와 길을 찾는 것을 무심하게 쓸어버리고 나니, 그 자리에 큰거미가 와서 두리번거려 서러운 마음이다. 가슴 한 곳에 구멍이 난 듯한데, 갓 깨어난 작은 새끼거미가 아물대니 가슴 메이는 시인이다. 가족이 흩어져서 서로 애타게 찾을 것 생각하니, 왜 애달프지 않겠는가. 엄마와 누나와 형이 만나 즐거운 밥상을 마주하기를 기도할 때 얼마나 미안했을 것인가. 우리가 치워버리는 작은 생명의 가슴 반쪽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구나. 좁쌀 하나에 온 우주가 들어있음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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