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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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1.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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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래기
신 덕 룡

흙벽과 처마 밑, 햇볕 뜸한 곳에 시래기들 뒤틀린 채 걸려 있다. 이른 봄볕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사이사이 헐거워진 몸이 바람그네를 타고, 물기 말라 투명해진 이파리들 귀퉁이부터 부서진다. 하늘로 머리 풀어 헤치고 땅거죽 위로 탱탱한 몸 불끈, 솟구치는 꿈도 있었으리라. 이제는 길섶의 잔설들이 제 그림자에 놀라 그 자리에 자지러지듯 몸이 우는 소리, 뼛속에 눌러 가두고 있다.

털어내지 못한 소리의 기억, 아찔하다. 무문(無門) 앞에서 문고리에 매달리듯, 말끔하게 비워내지 못하는, 저 아둔함이야말로 밉지 않은 가난이다. 낯설지 않다.

시집 '소리의 감옥'(천년의 시작)중에서

<김병기시인의 감상노트>

세상의 낡은 몸에서는 목 쉰 바람소리가 난다. 몸의 무게를 모두 밖으로 밀어버리고 가볍게 벽에 걸린 날에는 흔들릴 줄 안다. 헐거워진 몸이 귀퉁이부터 부서져도 가만히 귀를 대면, 땅을 밀던 그 탱탱한 노동의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냄비 안에서 물을 만나면, 다시 초록의 꿈을 밀어 올리려고 잔뜩 부풀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시래기국을 먹으며 땅 속의 밑동들과 은밀한 교감을 하며 차갑게 풀어진 인간의 저녁을 위안 삼는다. 바람에 부서져도 다시 살아날 꿈을 꾸는 것들은, 문이 없는 곳에 자신을 매달고 희망의 깃발처럼 흔들린다. 밭에 버려진 시래기를 걸며 겨울을 웅숭깊게 지내는 할머니의 손도 가끔 만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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