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발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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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1.1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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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향기
청주 사천초교 교사 노영남

알토란같이 여문 벼를 다 털은 논둑길 옆 은행나무들이 황금옷을 입고 코스모스 춤사위에 넋을 잃은 가을. 도심속 학교치곤 농촌의 정경을 지닌 새 학교. 하늘거리는 실크 커튼처럼 드리운 안개 속 학교를 채 발견하기도 전에 어김없이

"선생님! 선생님!"

창문에 밤알처럼 매달려 손을 흔들고 있는 재현이. 이제껏 살면서 누가 이렇게 날 반갑게 맞아주었던 적이 있었을까 재현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환호에 가까운 반가움으로 날 맞아준다. 이제 나에게 있어 늘 반복되는 이 환영식은 재현일 보다 특별하고도 소중하게 여기는 하루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의식과도 같이 여겨진다. 엄마가 없어 아침밥도 챙겨먹지 못하고 늘 눈뜨기 무섭게 필통하나 달랑 든 가방을 메고는 학교로 향하는 재현이의 등교는 그 누구보다는 가장 빠르다. 그리고는 줄곧 창문을 열어 재친 채 교문으로 한둘씩 들어오는 반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외치며 그렇게 반가움으로 하루를 연다.

"재현이, 어디 보자. 오늘도 눈곱이 발등 찍겠다. 얼른 세수하고 와."

넉살좋은 녀석이지만 짐짓 부끄러운 양 뒤통수를 긁적이며 화장실로 향한다.

"선생님, 세수했어요. 잘했죠 히히히"

앞머리 한가닥 젖지 않은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들어와 쑥 얼굴을 내밀며 큰 입을 헤 멀리고 히죽이 웃는다. 오늘도 그 웃음, 오래가면 좋으련만…….

1교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엉엉 소리내어 우는 소리. 재현이다. 옆 친구가 수업시간에 멍하니 앉아있는 자기에게 바보같다고 했단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주먹이 올라가던지 별의 별 욕설이 난무했겠지만, 오늘은 이상하다. 아니라고 받아치면 될 것을 무엇이 그렇게 말 한마디 못하게 하고 서럽디 서럽게 울게 하는지 영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우유랑 같이 먹으라고 내민 과자하나가 긴 울음을 잠재웠다.

2교시. 수학 문제풀이에 집중하느라 연필 움직이는 소리만 나는 조용한 교실에 갑자기 커다란 욕설 한마디와 동시에 연필이 날아간다. 나눗셈을 풀고 있는 친구들과 다르게 새롭게 시작한 뺄셈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조금이라도 어렵거나 힘들게 어겨지면 해내기 보다는 회피하고 외면하려는 재현이가 본성을 드러낸 모양이다.

"재현아, 많이 어렵니 우리 같이 할까"

햇볕에 그을린 검은 손을 모두 쫙 펴고, 하나하나 손을 접어가며 어렵사리 열 문제의 험난한 산을 모두 넘었다. 오늘 기분좋게 하루를 시작하더니 성과가 이만저만 좋은게 아니다.

"재현아, 이제 글자 공부할까 무슨 글자 써볼까"

"나비랑, 우유랑, 컴퓨터랑……."

"컴퓨터는 너무 어려울 것 같다. 그건 다음에 하기로 하고, 나비랑 우유 쓸까"

"네에에"

재현이는 3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알지 못한 터다. 글자 한 획 한 획을 그림그리듯 연필에 온 힘을 실어 써 내려간다. 한 낱말쓰기 조차 힘들 정도로 집중력이 없는 재현이가 오늘은 나비, 우유를 연속해서 3번이나 쓴다. 이런 날은 정말 재현이가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덕분에 다른 아이들 수업도 맥의 끊김없이 순순히 진도가 나가니 말이다.

"선생님! 재현이 없어요. 또 나갔나 봐요."

급식을 마치고 들어오자 아니나 다를까 잘한다 싶었던 재현이가 그냥 하루를 넘기기 서운했나 보다. 지난번에도 갑작스럽게 교실을 나가 계단 난간에 매달려 있는 것을 가까스로 잡은터라 다치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덜컥 겁부터 났다. 아이들 몇 명과 놀이터며 학교 운동장이며 5층 건물 구석구석을 땀 범벅이 되도록 뛰어다녔다. 얼마나 지났을까 강당 끝 구석에서 엎드린 채 누워있는 재현이를 발견했다.

"재현아! 왜 여기 와 있어 많이 찾았잖아."

"엄마가 보고 싶어서요."

늘 과하리만큼 낙천적이고 때론 터프한 녀석의 눈망울에 물여울이 일렁인다. 찾으면 혼쭐을 내서 두 번 다시는 이렇게 찾아 헤매지 않도록 해야지 벼르고 별렀던 마음이 한 순간에 무너지며 재현이를 꽉 안아주었다. 꽤나 땀냄새가 났을 텐데도 녀석은 점점 더 가슴팍으로 밀고 들어온다. 어미새 날갯죽지를 찾아드는 어린 새처럼….

"선생님이 엄마였음 좋겠어요. 정말이에요. 안녕히 계세요."

필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가방을 둘러매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이리저리 책상 사이를 뛰어다니던 재현이가 어느새 교실 앞문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 외치며 달아난다. 여느때보다 인사 소리가 더 우렁차다.

난 참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저런 자식들이 참 많아서…….열 손가락 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 않았는가! 하나같이 다들 소중하고 귀중한 나의 자식들이다.어느 아이 하나 빼놓지 않고, 엄마의 손길로 그들의 아픔, 슬픔 하나하나 어루만질 수 있고, 엄마의 향기로 달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글자를 모르는 재현이가 웬일로 일기장을 냈다. 어디서 배웠는지 쓰여진 한 낱말.

'엄마'

답장대신 교실에 활짝 피어있는 노오란 국화꽃 한송이를 예쁘게 붙여주었다. 일기장을 펴며 가득한 엄마의 향기를 느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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