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명품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5.08.1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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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안희자 <수필가>

푸른 물결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파도가 하얗게 무늬를 그리며 너울거린다. 느닷없이 떠나온 서해. 여름손님이 반갑다는 듯 바다는 옥색 치맛자락을 나풀대며 내게로 달려온다. 마치 자식을 마중 나온 어머니처럼. 푸른 풍경을 눈에 담고 모래밭을 따라 걷는다. 한낮 뙤약볕이 정수리를 내리치자 그리워지는 건 그늘 밑이다.

그때 어디선가 한 청년이 나타났다. 덩치가 크고 피부도 가무잡잡한 그가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한마디 한다.

“사모님, 쉬었다 가시죠? 전망 좋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자릿값은 잘 깎아 드리겠어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뒤이어 청년이 덧붙이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 고개를 돌렸다.

“(ㅇㅇ)명품 가방도 드셨는데… 그냥 가시면 후회합니다.”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대접받는 이 기분? 과시욕이랄까. 무언가 보상받는 기분처럼 묘한 감정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우쭐한 기분 탓에 흥정은커녕 선뜻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고 말았다. 그리고 거만스레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파라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불빛에 찌들었던 마음이 고운 빛깔로 빚어진 자연의 색에 희석되어 내 안에 들어와 푸른 경전이 된다. 물결이 바람에 제 몸을 내어주고 부딪히며 내는 파도소리가 마치 아코디언을 연주하듯 아름다운 선율로 내 귀를 재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땀방울은 굵어지고 숨이 막힐 지경이다. 게다가 소금기 배인 해풍으로 온몸이 끈적거린다. 이어 거센 바람이 몰아치면서 모래알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삽시간에 가방을 뒤덮는다. 휴지로 털어보지만 소용이 없다. 급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불편함은 내가 자초한 일. 허영심이 부른 대가이다.

젊은 날 나는 변변한 가방이라곤 없었다. 친구들이 명품 가방을 들고 다녔을 때 사뭇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살림이었던 터라 사치는커녕 생계를 잇기에도 버거운 삶이었다. 그런 나에게 명품 따윈 어울리지 않았다.

오십 대가 된 어느 생일날이었다. 딸들에게서 명품 가방을 선물로 받았다. 극구 마다했지만, 자식으로서 감사의 마음이고 나이 들면 초라해 보인다며 딸들은 억지로 떠맡겼다. 어색하면서도 행복했다. 언제부턴가 가방에도 몸값이 붙여졌다. 가축에 등급을 매기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요즈음 ‘강남 며느리’도 반해 산다는 짝퉁명품이 불티 난다고 하니 여성들의 본성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어릴 적 친정어머니는 손수 광목으로 만든 가방을 들고 다니셨다. 코스모스 꽃으로 곱게 수를 놓아 어머니의 가방은 하늘하늘 꽃이 피어 있었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무늬 가방은 변신의 귀재였다. 장날이면 시장바구니로, 결혼 후 내 집을 찾아올 때면 내가 좋아하는 오이장아찌며 잡채, 김치 등 밑반찬을 만들어 가방이 미어지도록 넣어 오시곤 했다. 그런 어머니 손엔 늘 예스러운 낡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어머니의 가방은 따뜻함이며 영원한 그리움이다.

명품이 아니면 어떤가. 무엇을 넣든 편하면 그만이지. 아무래도 명품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소유물에 불과했다. 내 욕망과 허영기를 누르고 나를 비우고 버려야만 진정한 명품으로 거듭나리라. 언제까지나 꽃으로 피어나는 어머니의 소박한 가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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