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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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6.2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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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 이수안 <수필가>

일행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하다. 생전 처음 보는 포도나무의 수형 때문이다. 천정식도 울타리식도, 그렇다고 주립식도 아닌 사발식이라니…. 

여기는 중국 선화고포도원. 박사님들과 농사꾼 등 35명이 중국포도산업을 탐방하는 중이다. 하북성 장가구와 인접한 이곳에는 특이하게도 밥사발 형태로 둥그렇게 설치한 대형 시설물에 나무를 유인해 포도를 결실시키고 있다.

가을이면 포도나무를 땅에 묻기 위해 이 시설물을 해체하고 이듬해 봄 다시 설치한다고 한다. 100평짜리 하나를 해체하는데 혼자서 일주일이 걸린다니…. 그 풍부한 노동력에 주눅이 든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거대한 인공구조물 만리장성을 쌓은 민족이 아니던가. 6·25전쟁 때 국군이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밀린 것은 중국의 인해전술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넓은 대지와 풍부한 노동력이 있는 나라. 광활한 대지에서 포도를 생산한다는 정책을 세우기만 한다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을까. 머지않은 미래에 중국산 포도가 우리 시장을 잠식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FTA체제, 이것은 우리 농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천적이다. 세계화 시대의 지구 곳곳에서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천적들, 그들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우리 포도농가의 앞날은 어떤 모습일까. 

미국 애리조나주의 그랜드케년 케이밥 고원에는 4000여 마리의 사슴이 살고 있었다. 인간은 사슴의 천적인 퓨마와 늑대 등 육식동물들을 제거했다. 사슴 세계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 결과 사슴의 개체수는 급속히 증가해 7만마리까지 늘어났다. 그런데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원의 풀이 부족해진 것이다. 먹이가 모자라자 굶어 죽는 사슴이 늘었고 사슴 세계는 병들어갔다.

천적을 없애주면 사슴 세계가 평화로울 거라 생각한 인간의 계산이 빗나간 것이다. 어찌 보면 천적들이 사슴 세계를 건강하게 유지시켜 왔는지도 몰랐다. 사슴들은 천적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더 강해지고 빨라져야 했다. 그중에서도 약한 사슴들은 천적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약자들의 희생은 날쌘 사슴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칠레와의 FTA협약이 실행되었을 때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칠레포도의 저가공세에 몰린 우리의 많은 농가들이 포도나무를 캐내야 했다. 자식 같은 포도나무를 캐내는 심정을 정치하는 사람들이 짐작이나 할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정말이지 아프고 두려웠다. 그것은 마치 약한 사슴들이 천적들에게 희생당하는 모습을 아프게 지켜보며 자신들도 언제 희생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건강한 사슴의 심정과도 같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FTA체제가 아무리 무서워도 피할 수 없다면 당당하게 맞아볼 일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천적을 상대해 오지 않았던가. 우르르 쾅쾅 무너질 것이라던 우르과이라운드와 WTO의 험한 준령을 넘어 이제는 FTA라는 천적을 상대하고 있다.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이 대단한 천적을 상대해 보는 것이다. 

이번 탐방길에 함께한 농사꾼들은 포도재배에 있어서는 1등 농사꾼들이다. 수입도 자유롭지만 수출 또한 자유로운 FTA 체제. 우리도 좋은 포도를 생산해 중국 등 세계의 큰 시장으로 수출을 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그랜드케니언 케이밥 고원의 건강한 사슴들이 천적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죽어라 달려 더 강해져야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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