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통일 도운 ‘직산현 최양유’
왕건의 통일 도운 ‘직산현 최양유’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5.06.0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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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주장

현재의 천안시는 조선시대 천안군·목천현·직산현 세 고을 땅이 합쳐진 곳이다.

천안은 930년 음력 8월 8일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결전을 앞두고 만든 군사 교두보적 신도시다. 그로부터 6년 후 왕건은 태자와 박술희를 군사 1만명과 함께 먼저 천안에 보내고 3개월 후 합류해 경북 선산으로 진격한다. 거기서 신검군을 크게 무찌르고 통일 기틀을 마련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천안은 탕정(온양)·대목(목천)·사산(직산)의 땅을 조금씩 떼 만들었다. 기존 세 고을의 중간지점에 신도시를 만든 것이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전쟁을 치르면서 여러 지방의 호족들과 복속 또는 갈등 관계를 맺었다. 후백제와 국경을 이뤘던 현재의 충청도는 더욱 그러했다. 청주는 고려에 예속됐지만 호족들이 수시로 반란을 일으켜 못 믿을 땅이었다. 청주와 가까운 목천도 비슷했다. 반면 천안 인근으로 고려에 귀속된 온양과 직산은 토착호족이 없던 걸로 알려졌다.

그런데 직산에 큰 호족이 있었음을 알리는 자료가 나왔다. 한림대 김용선 교수는 지난 4월 한국중세사연구 41호에서 고려 재상을 지낸 직산현 출신 최홍재(崔弘宰:?~1135) 묘지명을 소개했다. 무인인 그는 윤관을 도와 여진족 정벌에 나서 공을 세우고 재상까지 된 인물이다. 무덤은 파주와 가까운 북한 장단에 있는데 묘지명을 새긴 지석의 탁본이 공개된 것이다.

묘지명 중 눈에 확 띄는 내용이 있다. 주인공 최홍재를 소개하는 첫 머리에 ‘고조 할아버지 최양유(崔良儒)’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고조는 삼한공신(三韓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양유로 직산현 사람이다. 처음 태조가 통합할 때 統合時) 양유가 같이 한마음으로 도와 공을 이뤘다(輔佑成功). 태조가 순행하여 이 현의 북악(北岳)에 이르러 양유가 사직을 지켰다고 하여(社稷之衛) 이름을 직산이라고 하였다(因名稷山).”

최양유는 왕건의 통일전쟁을 도와 공신이 됐고 최고 품계까지 올랐다. 사직을 지켰다고 하니 고려의 운명과 관련돼 큰 역할을 한 듯하다. 사직은 국가가 제사 지내는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으로 통상 국가를 뜻한다. 최양유는 후삼국시대 직산의 대표적 호족이었던 것이다. 공주·홍성·청주·진천 등에선 호족 존재가 확인됐지만 천안은 이름이 알려질 만한 호족이 없었다.

또 놀라운 건 직산 고을명 유래가 명확해졌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직산 이름을 사직과 연결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직(稷)이 곡식인 피를 뜻해 그쪽으로만 연관지었다. 태조는 940년 전국적인 고을명 개편 때 직접 직산에 행차해 최양유를 극찬하고 고을 이름에도 칭찬의 뜻을 담았다.

그런데 최양유 기록은 이 묘지명 외에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통일에 기여한 삼한공신은 3000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삼중대광까지 오른 이는 많지 않다. 고려 통일 후 200년이 흐른 시점에 후손의 묘지명에 등장한 최양유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해 사직을 지켰다는 칭찬을 들었을까. 936년 9월 후백제 공격을 앞두고 천안도독부의 병력 및 군량 확보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왕건은 천흥사터가 있는 성거산 이름을 오색구름이 산 주위를 감싼 걸 보고 성인이 산다는 뜻으로 지었다. 결국 천안·직산·성거산 등 천안 관련 ‘거창한’ 의미의 3개 지명을 왕건이 직접 작명한 셈이다. 왕건은 천안출신 천안부원부인을 11번째 후비로 맞아 아들 둘을 뒀다. 이래저래 왕건은 천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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