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의 전쟁
풀과의 전쟁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5.1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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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수안 <수필가>

제초제를 뿌리다 바람이 일어 그만두었다. 아침 일찍 나왔지만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 바람이 잠잠한 때를 놓쳐버렸다.

그동안 차광망으로 덮어버리거나 깎던 풀을 올해 처음 제초제를 뿌리려니 점검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약대는 적당한 것을 잘 선택했는지, 호스 이음새에 새는 곳이 없는지, 분무기의 압력은 너무 세거나 약하지 않은지 등을 살피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오늘은 일단 완벽하게 준비한 데에 만족하고 내일 일로 미룬다.

제초제를 뿌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큰 탓인가. 일은 별로 못했는데 한바탕 전쟁을 치른 사람처럼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진다.

농사지은 지 30년이 넘었으니 강산이 세 번 바뀌는 긴 세월 나는 풀과 싸움을 해 온 셈이다. 지금은 골칫거리지만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이 풀들을 얼마나 사랑스러워했는지 모른다.

혹독한 계절 겨울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그 존재를 드러내며 봄 소식을 알려준 봄풀들. 죽음의 계절을 잘 이겨낸 생명력이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게다가 민들레, 냉이, 쑥 등등의 풀은 봄 한 철 우리 밥상에서 봄 향기 폴폴 풍기며 입맛을 돋워주기까지 했다.

뜯을 때 나긋한 그 느낌이 손에 닿으면 투박한 내 심성까지도 연해지게 하던 참으로 특별한 존재들. 맹수도 어릴 때는 귀엽고 사랑스럽거늘 이른 봄 가장 먼저 연초록 생명을 피워 올리는 봄풀이야 오죽 어여쁘랴.

그러던 것들이 한 달 사이에 그 반대의 모습으로 나에게 대적하기에 이르렀다.

키도 훌쩍 자라고 억세어져 내 포도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위협하며 전투 분위기를 조성한다. 내가 농사꾼인 이상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이미 적이 되어버린 저들과는 오직 싸움만 있을 뿐 화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류보다 더 긴 세월 대대손손 내려오며 온갖 적들과 싸워 이긴 최고의 강자만 남았으니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완승을 하려다가는 일을 망칠 수도 있다. 이쪽 힘을 아끼면서 최고의 효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상책이다.

하여 오랫동안 해 오던 방법이 바닥에 두꺼운 차광망을 까는 것이었다. 노동력, 땅심, 환경, 비용 등을 고려해서였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성과도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둡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 뱀이 차광망 속에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럭저럭 몇 해를 버텼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겨우 세 살배기 손녀딸 서연이가 포도밭으로 오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그 어린 것이 뱀과 딱 마주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여 차광망을 걷어내고 승용예초기로 깎게 되었는데 나무 아래에는 기계가 들어갈 수 없으니 제초제를 뿌리기로 한 것이다.

씨 뿌리지 않아도 무수하게 올라오고 거름 주지 않아도 건강하게 잘만 자라는 풀, 풀, 풀. 한때는 귀하게 여겼으나 이제는 미워하게 된 풀. 내일은 이 대단한 풀과 한 판 승부를 벌인다.

많은 생각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데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것이 있다. 꽃마리꽃이다.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본다. 연보랏빛 꽃잎이 참 어여쁘고 해맑다. 이 함초롬한 얼굴 위로 무지막지하게 제초제를 뿌릴 것이 걱정이다. 그러나 너무 감정이입이 되면 일에 지장이 있을 터, 나는 얼른 일어나 내일 작전을 되새긴다.

‘희붐할 때 시작해 바람이 자는 오전 열 시까지만 부지런히 뿌리자. 유월까지 풀 걱정 없이 가보는 거야.’

지금 나는 풀과의 전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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