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박영대, 동아시아 문화도시 청주
보리, 박영대, 동아시아 문화도시 청주
  • 임성재 기자
  • 승인 2015.03.3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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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임성재 <칼럼니스트·프리랜서 기자>

「동아시아 문화도시 청주」의 개막식 주제는 ‘보릿고개를 넘어 생명문화도시로’였다. 보리는 무한한 생명력으로 북풍한설의 추위를 뚫고 살아나 어려웠던 시절 춘궁기를 넘기는 귀중한 식량이었다. 우리민족의 생명의 양식이었다. 이 보리가 「동아시아 문화도시 청주」의 테마가 된 것은 우연인지도 모른다. 「동아시아 문화도시 청주」 변광섭 사무국장이 이어령 명예위원장의 사무실을 찾아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 방에 걸려 있던 황맥(黃麥)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작가가 청주 출신 박영대 화백이라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은 이어령 명예위원장이 주제를 보리로 정하고 ‘보릿고개를 넘어 생명문화도시로’ 라는 슬로건도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개막식장 전체를 박영대 화백의 보리 그림으로 장식하라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동아시아 문화도시 청주」 개막식은 생명을 상징하는 보리와 청주의 아름다운 문화예술이 어우러져 멋진 하모니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보리작가 송계(松溪) 박영대 화백이 전시회를 열고 있다. 3월 18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전시에 이어 지난 25일부터 4월 3일까지는 청주예술의 전당 2층 대전시실에서 청주전시를 하고 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50년을 돌아보는 전시회다. 그의 초기 작품부터 최근의 작품까지 50여점이 전시된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품의 크기와 자연을 머금은 색채의 조화, 붓의 장중한 필치에 압도당한다. 

그가 푸른 보리밭(靑麥) 그림을 세상에 처음 내놓은 것은 1973년이다. 100호가 넘는 큰 화폭에 가득한 보리밭의 풍경은 보는 사람을 숙연케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진짜 보리밭 같은 세밀함과 그 많은 보리이삭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을 화가의 투혼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 것이다. 청맥과 황맥으로 이름을 알리며 작가로써 기반을 다질 때 쯤 부터 그의 작품은 변해갔다. 사실적인 보리에서 추상적인 보리로, 보리밭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한 알의 씨앗으로, 생명으로. 화면 가득 넘치던 채색화의 현란한 아름다움은 검은 먹의 웅장한 힘으로, 화폭 가득 채웠던 묵의 흔적은 과감한 여백으로, 검은 먹의 장중함에서 동양화에서 금기시 하는 붉은 주색으로까지 그의 그림은 과감히 변화해 갔다. 그러나 어떤 변화에서도 그의 작품의 화두는 보리였다. 

일흔 네 살, 작품 활동 50년이면 편안한 노후를 즐길만하건만 그의 작업엔 쉼이 없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절정이라고 말한다. “나의 스승이신 박생광 선생은 78세부터 5년간 치열하게 작품에 매진하여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나도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이런 치열한 예술 혼은 모진 풍파를 헤쳐 온 그의 삶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농가의 아들, 가난 때문에 미술대학 진학 포기, 검정고시로 교사자격증 취득, 고등학교 미술교사, 교사 10년 만에 전업작가 선언,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인사동으로 진출, 인사동에서 20년 동안 작업, 그리고 귀향. 청주에 돌아와 10년 동안 작품 활동에 매진해 온 그의 생활신조는 화가는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 밥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후배들에게 남기는 말은 ‘죽을힘을 다해 그리라는 것이다.’ 무에서 희망을, 생명을 건져 올리는 박영대 화백은 앞으로 10년간은 붓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보리가 또 어떻게 변해갈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으로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그는 영원한 청년작가다. 

예술은 끈기이고 기다림이며 자신을 불태우는 노력이다. 「동아시아 문화도시 청주」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성과에 조급해하기보다는 내일을 위한 꾸준한 투자와 일관된 정책이 필요하다. 첫해에 뿌린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청주시가 긴 안목의 문화정책을 이어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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