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 승인 2014.12.3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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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숨을 몰아쉬며 남산의 마지막 깔닥고개에 올라섭니다. 낙엽을 걸친 벤치를 쓸고 앉아 땀을 닦으려니, 곁의 소나무 가지에 리본처럼 접어 매여 있는 하얀 메모지가 보입니다. ‘먼-훗날 우리들 머리에 눈 내려앉을 때 / 우리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 / 꽃이 피고 지고 또 피는 이유를 /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는 까닭을 / 동화처럼 이야기 했으면….’ 아니! 동화처럼 이라니, 이별을 동화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궁금해서 겨울이 와도 산행을 계속 해야겠습니다. ‘머리에 눈 내려앉은 것’은 다음 계절을 의미하는지, 머리칼이 희어지는 세월을 의미하는지 궁금한 채로 메모지를 정성스레 다시 매어 놓고 내려옵니다. 

물감을 쏟은 듯, 울긋불긋 낙엽이 깔린 남산 길을 오르면서 혼자 걷는 고적함으로 쉽게 감상적이 됩니다. ‘시몬, 나뭇잎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을이 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애송하는 구르몽의 시도 떠오릅니다. 내 걸음을 스치며 누군가의 몸에 지닌,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노래가 되어 버린 시, `세월이 가면'이 잔잔하게 가슴을 파고드는데 라디오 주인은 저-만치 가파른 길로 멀어집니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유작시입니다. 세상 떠나기(1956.3.20) 3일 전인 17일. 그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던 첫사랑 여인의 묻혀있는 망우리묘소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3일 낮과 밤 동안의 폭주 뒤에 돌연한 심장사로 생을 마쳤습니다. 다하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슬픔을 안고 발길을 주점으로 옮겨서 적었던 마지막 말들이,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에 공원/ 나뭇잎은 흙이 되고…/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싸늘한 가슴에 있네.’ 삭이지 못한 싸늘한 한 때문에 박인환이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을까요. 멋쟁이며 잘생기고 지성적인 남자가 전후의 폐허뿐인 공간에서 낭만만으로 버티기엔 무리였으니 비애로 가득한 허무의 시 `목마와 숙녀'의 탄생은 필연이었을 것입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가을바람은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 놓아 우는데.’ 단발머리시절 학교 앞 튀김 집 벽에 붙어 있던 `목마와 숙녀'를 나는 단번에 외워 버렸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아직도 줄줄 암송되는 ‘시’ 속의 상실감을 다시금 가만 되짚어 봅니다. 마른 명태를 앞에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박인환은 시를 쓰고, 테너 임만섭은 `세월이 가면'을 부르고 지나가던 행인들 발걸음을 불러들이며 박수를 받습니다. 영화 같은 시간을 끝으로 박인환은 갑작스레 떠나고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명동 엘레지’로 외로움과 회상의 상징으로 불립니다. 

어깨에 낙엽을 받으며 매일 걷는 남산 길, 박인환이 그곳에서 만난 ‘목마와 숙녀’ 함께 이곳에 두고 간 서러운 노래의 안부를 묻습니다. 낙엽은 이별의 은유! 살아내야 하는 삶의 밑거름임을 가르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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