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술은 새 부대에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4.12.29 18: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오늘도 베란다로 나가 우암산 자락을 바라본다. 구름이 산허리를 휘감아 돌고 있는 모습이 마치 선계의 풍경이 저러할까 싶다. 날마다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우암산을 바라보는 일은 14층 아파트로 이사하고 난 뒤 생긴 하루 일과다. 산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묵묵히 있는데 우암산의 풍경은 단 하루도 같은 모습일 때가 없다. 살면서 한 번도 내 자신이 아파트에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편리함과 안락함을 강조해도 아무렴은 마당 있는 집보다 좋을까 싶었다. 

시내로 이사 오기 전 농사짓는 일이 업도 아니면서 그저 마당과 흙을 밟는 것이 좋아서 십여 년을 주변 농부님들께 민폐를 끼치며 시골살이를 했다. 너른 마당에는 아이들을 위해서 잔디를 심었다. 대문 양 옆으로 내가 좋아하는 라일락을 문설주대신 심고 마당 수돗가에도 한그루 심어 놓았더니 봄이면 라일락 향기가 온 집안을 휘돌았다. 여름과 가을에도 제철에 볼 수 있는 꽃들로 안배 했다. 잔디마당에 햇살을 받으며 피어나는 겨울눈꽃은 여러 종류의 꽃들 중 가장 백미였지 싶다. 비록 집은 오래되어 낡고 허름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낙원이었다. 평생을 그 집에서 보내게 될 줄 알았다. 

어쩔 수 없는 집안 사정으로 집을 남에게 넘겨주고는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몇 해를 밤 마실 가듯 몰래 집을 훔쳐보고 왔다. 이미 내 집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인데도 계절마다 그 집이 그리웠다. 봄이면 라일락꽃 흩날리는 나무아래에 다시 걷고 싶어지고 여름날에는 모깃불 피어놓고 평상에 누워 아이들과 두런거리며 별을 보고 싶었다. 내가 아무리 옛집을 그리워 해본들 그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이 주인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과거의 우리 집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했다. 

가게 가까이에 적당한 집이 매물로 나왔다고 했을 때 남편이 내게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베란다에서 전망만을 보라고 했다. 아파트라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싫어했으니 꽤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다른 것은 보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었다. 

어려서부터 트인 곳에서 자라온 환경 탓인지 집 앞이 가로 막히고 햇빛이 들지 않는 것을 못 견뎌 했다. 그래서 언제나 집을 보는 조건은 앞이 트여 햇빛이 드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난생 처음 아파트 14층 높이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산자락에 드리워진 구름의 풍경은 그날로 주저 없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했다. 

삼복더위 기승을 부리던 무더운 여름날, 새집으로 이사를 하며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과거의 옛집에게 이별을 선언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을 곱씹으며 나도 그러리라 다짐 했다. 여름에는 모깃불 피워놓고 밤하늘별을 바라보는 대신 멀리보이는 도시의 야경도 볼만하고, 가을이면 눈부시게 파란하늘이 가까이 있어 행복했다. 지금은 아파트로 이사 와서 세 번째 계절인 겨울을 즐기는 중이다. 

어느 사이 우암산 자락에 걸린 구름이 모두 걷히고 나무사이로 햇살이 가득하다. 올해도 며칠 후면 막을 내린다. 모두들 송년회며 해맞이 계획을 세우며 분주한 듯하다. 새해를 맞이하게 되면 지난 시간들은 과거의 시간일 뿐이다. 그 과거의 시간을 털어내지 못하면 현재와 미래를 위해 새 부대에 결코 새 술을 담을 수 없을 터, 차마 떨쳐내지 못해 앙금처럼 남아 있을 지난 일들이 있다면 미련을 버리리라. 내 앞에 놓여 있는 새 부대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