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에로가 되어
삐에로가 되어
  • 김혜식(수필가)
  • 승인 2014.12.0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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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의 가요따라 세태따라
김혜식(수필가)

“다음주 월요일이 당신 생일인데 갖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일은 고사하고 결혼기념일도 모르는 남편이다. 그런데 어인일로 내 생일을 기억하고 이런 제안을 해온다는 말인가. 사노라니 남편에게도 이런 자상한 면이 있었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찡해온다. 나는 수화기를 잡은 채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명품 가방, 아니면 귀금속?”

남편은 다시 이렇게 다그쳐 묻는다. 나는 명품 따위엔 별 관심 없다.

“갱년기 증세완화 복용 건강식품.”

얼떨결에 이렇게 답했다. 밤중에 잠을 깨면 뜬 눈으로 지새우기 예사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난다. 누군가 비위 상하는 말을 하면 가슴 속이 ‘욱!’하고 치민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루룩’ 흐르기도 한다. 나는 이런 증세를 나름대로 철 늦은 갱년기라 진단했다. 달라진 나의 모습에 남편은 난처하다는 기색이다. 여성들의 갱년기가 무서운 병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까닭없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려도 화를 내지 않는다.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 앉으며 내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남편 역시 젊은 날과 많이 달라졌다. 장도 봐주는가 하면 채소를 다듬어 주기도 하고, 설거지는 물론 집안 청소까지 거들어 준다. 젊은 날 그토록 고수하던 남성 권위의식을 훌훌 벗어던지고 갱년기에 시달리는 아내를 위해 틈만 나면 집안일을 도와주는 남편이 고맙다. 

그러고 보니 집안일을 거드는 일이 아내에게만 이득이 되는 게 아니다. 집안일을 거들때마다 많은 양의 칼로리가 소모돼 건강에도 도움이 될 터이니 말이다. 평소 바빠서 운동할 틈이 없는 뭇 남성들은 오늘이라도 아내의 수고도 들어줄 겸 본인의 몸에도 약이 되는 것이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집안일 충실히 도와야 할까 보다. 집안일에 짓눌려 화가 나는 아내를 위해 만들어 놓은 명곡도 입속으로 흥얼거리며 말이다. 가수 김국환의 ‘우리도 접시를 깨뜨리자’가 그 노래이다.

-자~ 그녀에게(그녀에게) 시간을 주자 (시간을 주자)/저야 놀든쉬든(놀던쉬든) 잠자든 상관말고/거울 볼 시간(볼시간) 시간을 주자(시간을 주자)/그녀에게도(그녀에게도) 시간은 필요하지/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부엌으로 가서 놀자 아항/그건 바로 내 사랑의 장점/그녀의 일을 나도 하는 것 필수감각 아니겠어/그거야 자 이제부터(이제부터) 접시를 깨자(접시를 깨자)/접시깬다고(접시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자 이제부터(이제부터) 접시를 깨뜨리자 접시를 깨뜨리자-

복사꽃처럼 어여뻤던 아내의 머리에 서리가 내린다. 아이들 키울 때 낮잠 한번 늘어지게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 돼지저금통을 깨뜨려 전기밥솥 사던 날 몇백만원짜리 명품 핸드백, 천만원짜리 모피코트 살 때보다 어깨에 힘주던 아내다. 쥐꼬리만한 남편의 월급에서 한푼 두푼 적금 드는 재미에 싸구려 화장품만 사서 쓰던 아내다. 자신의 외양 가꾸기보다 자식들 학원 한군데라도 더 보내려고 ‘육거리 시장 표’ 옷만 입어온 아내다.

그러다가 주름진 아내의 손이니, 손 한번 잡아주자. 아내가 곤히 잠들었거든 이불깃을 다독여 주자. 그동안 전하지 못한 사연 귓속말로 속삭여 보라. 그리곤 좀 로맨틱한 음성으로 ‘여보! 올 한해도 고마웠어 사랑해!’ 이렇게 칭찬도 해 주는 시간도 가져봄은 어떨지. 아내 얼굴엔 분명 행복의 꽃이 피리니. 그리고 그 행복의 웃음꽃은 乙未年을 위한 에너지로 승화되리니.

남편들이여! 오늘만큼은 아내 앞에서 아내를 즐겁게 해주는 삐에로가 되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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