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은 또 다른 시작
끝물은 또 다른 시작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4.11.2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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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가을 끝자락에서 씨앗을 거두었다. 연초록 새순이 자라서 푸르러진 풀꽃들이 어느새 제각기 생명의 한 단락을 맺었다. 향기롭고 화려했던 꽃 세상은 아예 사그라졌다. 씨앗들과 팃검불이 꽃밭에 남아있다. 가시오가피나무도 꺼뭇한 씨앗만 조롱조롱 매달고 있다. 

풀꽃들은 아름답고 예쁘게만 자라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하지 않은 풀꽃이 더 많다. 갖가지의 향을 쫓아 벌들이 쏘아대고 잠자리 떼는 꽃밭 위를 사정없이 맴돌아 나비들이 어지러워 저지레를 해 놓는다. 

유독 향이 짙은 회향을 갉아먹은 푸른색과 노란 꽃의 줄무늬를 가진 호랑나비 애벌레는 향기까지 몸에 배게 하여 애벌레의 천국이기도하다. 태풍이 훑고 간 자리는 꽃줄기가 부러지고 패인 구덩이엔 소금쟁이가 판을 친다.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움의 극치를 더하지만 이토록 수난을 겪으며 피우는 풀꽃들이다. 

온갖 곤충들에게 갉아 먹히면서도 꽃을 피우고 더러는 쭉정이도 있지만 대부분 실하게 영글었다. 아무리 강인한 야생화라 할지라도 온전히 견뎌내기가 어려웠을 텐데 제각기 이름값을 했다. 

올 한해도 벌써 마무리 되어간다.

수없이 많은 의무와 노릇들이 포위되어있어 하루하루를 희 노 애 락에 구속 되어 살면서 그 바쁜 중에도 열등감이란 심리적 고통도 느꼈다. 

하루를 스물다섯시간처럼 많은 일을 하는데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지” “다른 사람보다 내다 더 나은데” 알아주지 않는다며 나 자신이 열등감에 사로잡혀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었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떨 때는 화낼 일도 아닌데 버럭 화를 내기도하여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만 생각하면 “이렇게 화낼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화를 냈을까” 하고 마음이 불편해 지면서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떤 날은 열등감이 꿈속에서 무의식으로 보여 지기도 했다. 나는 모든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욕심이었던 것 같다. 내 삶의 아름다운 끝물을 엮어보며 씨앗을 거두어들인 꽃밭을 돌아본다. 

앞마당엔 언제나 들꽃 가득 피워 맞이한 손님에게 들꽃 향을 전해줄 것이다. 무량으로 주는 신선한 공기며 들꽃씨앗 모두가 참살이이고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 많은 곤충과 자연의 방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들꽃에게서 다른 시작을 약속하는 진솔함과 강인함을 배운다. 끝물로 남은 씨앗들을 보면서 나는 현실을 인정하며 내 삶을 받아들여 무의식에 숨은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 봐야 할 것 같다. 내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하고 가치 있는 또 다른 시작을 위하여. 그리고 초록빛 봄바람이 꽃밭에 살포시 내려앉는 날, 종이봉투에 몫몫이 갈무리한 들꽃 씨앗을 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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