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둘, 소크라테스와 옛 늙은이, 그리고
일흔둘, 소크라테스와 옛 늙은이, 그리고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4.10.09 1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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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知不知(지부지)는 上(상)이요 不知知(부지지)는 病(병)이라. 夫唯病病(부유병병)이면 是以不病(시이불병)이요 以其病病(이기병병)이니 是以不病(시이불병)이니라.

- 모른다는 것을 알면 나무랄 데가 없고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은 근심거리이다. 모름지기 병을 병으로 안다면 그것은 병이라 할 수 없으니 병이 병인 줄 아는 까닭에 병이라 할 것이 없는 것이다.



=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으뜸’이라고 말하는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교육방법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이끌어내고, 거기에서 답을 찾게 하는 것이었음이 떠오르는 까닭입니다. 그런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남긴 것이 플라톤이 쓴 스승의 이야기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것이야 모를 이가 별로 없을 터인데 젊었을 때 읽었던 그 책을 나이 쉰 넘어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참으로 놀랍고 훌륭한 이야기이고 젊었을 때 읽은 것은 읽은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하나 있는데 소크라테스가 옛 늙은이와 많이 닮아있는데 그의 제자라고 알려진 플라톤은 옛 늙은이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있다는 것, 차라리 디오게네스가 소크라테스의 적통을 잇는 제자 자리를 지켰더라면 서양철학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바로 그 아쉬움의 실체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렇게 중얼거린다 하더라도 역사에 만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 다만 그 아쉬움으로 소크라테스와 옛 늙은이가 같은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을 그려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림은 이내 복잡해져서 그 자리에 예수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부처도 거기 초대되며 수운 최재우도 와서 자리에 앉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이야기하면서 현재를 조명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합의를 이룬 가르침을 이끌어내어 미래를 여는 열쇠로 삼는 데까지 헤아림이 내닫게 되면 혼자 흐뭇해서 절로 입가에 웃음이 괴곤합니다.

태어남과 살아감, 존재한다는 것과 그 존재가 죽는다는 것, 태어남과 죽음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공평한데 하나의 존재가 살아가는 과정 거기에 갖가지 차이와 차별이 발생하게 되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의 존재함이 다른 누군가의 불행이나 비극이 되고 그것이 얽히고 복잡해지면서 존재를 비관하게도 되는 것, 그것을 사회라고 하기에는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서글퍼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옛 늙은이가 病(병)이라고 갈파한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느냐 싶은데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철학자가 바로 키에르케고르입니다.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시기에 밤을 새며 읽었던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 그러나 그 책이 절망을 향해 들어가는 문이 아니고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내가 그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는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그것을 알고 살면 삶이 병은 아닐 터인데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병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옛 늙은이의 속삭임, 유한한 생명을 갖고 태어나 언젠가는 갈 터이니 어떻게 살겠느냐는 물음이 아니겠느냐 싶은데, 그런 말을 한 이가 어디 옛 늙은이 뿐이겠는가 싶어 이런저런 이들을 들먹였다는 것, 알만 한 이들은 아시지 않겠느냐고 혼자 중얼거리며 혼자 싱긋 웃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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