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회상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4.05.29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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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마당 한쪽에 큰 솥 하나 걸어 놨다. 곰국을 끓일 때나 메주콩을 삶을 때 요긴하게 쓴다. 요즘엔 혹여 아버지께서 드실 수 있을까 하고 곰국을 끓이고 있다.

국물이 졸아들면 다시 물을 붓고 며칠째 불만 땐다. 마른 장작에 불이 붙는 것을 보고 창고에 조금 남아 있던 감자를 가져다 불 앞에 앉아 껍질을 벗겼다.

작년 하지에 아버지께서 농사지어 놓은 것을 수확해 온 것이다. 해동하면서 싹이 트기 시작한 감자는 싹을 떼어내도 또다시 싹을 틔우더니 이젠 모든 기운이 소진되었는지 물기가 빠져 쪼그라들고 속까지 거뭇하게 썩어 있다. 주사바늘 꽂혀 있던 아버지의 팔뚝과 주름진 손등을 닮았다.

친정아버지께서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 남들은 사실 만큼 사셨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하나 가당치 않은 위로다. 내겐 부모가 아픈 것도 자식 아픈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애달프다. 나는 병실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어린 자식으로 돌아가 재잘댄다. 허나 잘 해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여간해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도 당신으로 인해 자식들 고생시킨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눈을 붉히신다. 아버지의 눈물은 자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얼마 전엔 병이 깊어진 것을 스스로 느끼셨는지 내색 없이 주변정리를 하시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지난 삶을 담담하게 회상하신다. 눈길이 아득하셨다.

일찍 혼자되신 할머니와 어린 동생들 때문에 아버지 자신의 삶은 버렸다고 했다. 열심히 일해 삼촌과 고모를 공부시켜 혼사 치르고 났더니 너희 오 남매의 중등교육이 기다리고 있더라 하신다.

그 무렵 더욱 힘들었던 일은 할아버지께서 아들들에게 똑같이 나눠주신 많지 않은 재산을 형은 노름으로, 동생은 사업으로 모두 탕진한 것을 알고 아버지 몫으로 남겨 있던 것을 다시 나눠 줄 때였다고 했다.

그 일로 인해 네 엄마가 너희들 공부시키느라 많은 고생을 했지만, 후회는 않는다고 하신다. 욕심을 버리고 한 발짝 양보하니 동기간의 우애가 깨지지 않았고 노력하다 보니 풍족하진 않지만 재물은 다시 모여지더라고 했다.

나는 늘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농사일을 하시면서 왜 자식들에게 한 번도 일을 시키지 않으셨는지 여쭤보았다.

힘든 일 하다 공부를 하게 되면 피곤해서 두 개 배울 거 하나 밖에 머릿속에 들어가질 않을 테고 놀다 하면 하나 알 것 두 개는 쉽게 배우지 않았겠나 하신다.

돌아보니 힘든 세월을 지나왔지만 자식들이나 손주들이 하나같이 당신께서 어찌 될까 진정으로 걱정하는 걸 보니 가슴 벅차고 고마워 그만하면 잘살았지 싶단다.

오래전, 버스 안에서 아버지의 친구 분을 만났었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 같은 믿음직한 친구가 있어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그때 알았다. 남에게서 내 자식의 칭찬을 듣는 일보다 부모의 칭찬을 듣는 일이 더 기쁜 일이라는 것을.

나는 명예나 재물보다 빛나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삶의 길을 닮으려 노력했으나 흉내만 내고 살았다는 것을 안다. 생의 끝에서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자식 앞에서 아버지처럼 행복한 회상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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