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달, 5월
잔인한 달, 5월
  • 임성재 기자
  • 승인 2014.05.0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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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임성재 <프리랜서 기자>

T.S 엘리어트는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라며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그 잔인한 달, 4월을 보내고 화사한 봄의 계절, 5월을 맞았다. 5월의 시작은 황금연휴로 이어졌다. 모처럼 가족들이 모이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LP판을 찾아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도 마음은 더 무거워지고 깊은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통곡의 바다 그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4월 16일 세월호의 침몰로부터 시작된 악몽이 화사한 봄의 계절, 5월이 왔건만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혹한의 겨울보다 더 차디찬 희망을 노래할 수조차 없는 계절을 맞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는 추모객의 행렬이 끝도 없이 길었다. 줄지어선 이들의 머리 위로 펼쳐진 맑은 하늘과 연록 빛 녹음은 차라리 잔인함이었다. 흰 국화송이를 쥐고 끝없이 이어진 영정 앞에서 조문하는 어린 아이들의 슬픈 얼굴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 왔다. 새들처럼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꾸어야 할 어린이날에 생면부지의 언니, 오빠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 아이들이 느꼈을 아픔의 깊이는 헤아리기조차 두렵고 힘들다. 어떤 말로 위안하고 달랠 수 있을 것인가? 자꾸만 시려오는 눈시울을 감추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건만 이렇게 맥없이 살아온 대한민국의 어른이라는 부끄러움에 눈을 그대로 뜨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해경의 구조선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배가 침몰했고, 20여 일 동안 구조작업을 펼쳤는데도 어떻게 단 한 사람의 목숨도 구해내지 못했을까? 처음에 국민들은 전원구조라는 보도에 안도했다. 그러다가 오보로 밝혀졌지만 우리 해경을 믿었고 정부를 믿었다. 그래서 구조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중계 방송되는 구조작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단 한사람의 생존자도 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참사 22일째인 오늘까지도 33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하는 이 참담한 결과 앞에서 우리는 분노하고 절망한다. 수많은 아이들과 승객들이 그대로 수장되어 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던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되어버렸고,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었다.

과연 대한민국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국가인가? 이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 것인가? 요즈음 만나는 사람마다 울분을 섞어 토해내는 질문이다. 어디서부터 답을 찾아야 할지 몰라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꿈조차 줄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네가 있는 이 세상을 안전하게 지켜줄 터이니 어른들을 믿고 마음껏 뛰어놀고 잘 자라면 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요즘처럼 어른인 것이 부끄러운 적도 죄스러운 적도 없다. 이 아름다운 5월이 이토록 잔인한 시간인 적도 없었다.

전국 곳곳에 합동 분향소가 차려 지고 촛불 추모제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의 침묵시위도 이어진다.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이 횃불이 되어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맑은 눈빛에 흐르던 눈물과 온 국민이 겪는 이 아픔을 잊어선 안 된다. 원인을 찾아내고 대책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국가가 할 일이다. 그러나 이 참사를 대하는 정부를 보면서 진정한 국가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참으로 잔인하고 슬픈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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