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경직과 고정의 위험성
쉰, 경직과 고정의 위험성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4.04.1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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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聖人(성인)은 無常心(무상심)하니 以百姓心(이백성심)으로 爲心(위심)하느니라.

善者(선자)에 吾善之(오선지)하고 不善者(불선자)에 吾亦善之(오역선지)하니 德善(덕선)이요, 信者(신자)에 吾信之(오신지)하고 不信者(불신자)에 吾亦信之(오역신지)하니 德信(덕신)이라.

聖人(성인)은 在天下(재천하)에 歙歙(흡흡)하여 爲天下(위천하)하고 渾其心(혼기심)하니 百姓(백성)이 皆注其耳目(개주기이목)에 聖人(성인)은 皆孩之(개해지)니라.

 - 제대로 사는 이는 정해진 마음이 없으니, 여러 사람들의 마음으로 그 마음을 삼는다./ 제대로 하는 이에게 제대로 대하고, 그렇지 못한 이에게도 또한 제대로 대하니, 큰 마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미더움에 미더움으로, 미덥지 못함에도 또한 미더움으로 대하니 큰 미더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는 그 살아가는 일에 어우러짐으로 삶의 길을 삼으며 더불어 함께 하니 많은 이들의 눈과 귀가 그에게 쏠리나, 그는 아무 일도 아닌 듯 살아간다.

역시 약간의 의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無常心(무상심)이라는 말로부터 인간관계를 탄력적으로 맺고 풀어가는 삶의 태도, 그리고 歙歙(흡흡)이라는 말을 ‘수용하는 태도’로 보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渾(혼) 역시 ‘섞인다’는 것보다는 ‘더불어 함께’로 풀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유연하고 탄력이 있을 때만 가능한데, 살아가면서 몸이나 사고가 경직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여기서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경직의 다음 과정은 고정(固定)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고, 여기에서 쓸데없는 고집과 독선이 나오게 되며, 고집과 독선은 배타적인 성격으로 이어지고, 폭력적인 성향을 갖게 되어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경직을 거쳐 고정의 단계에 이르면 형식에는 차이를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파괴적인 결과 말고는 나올 것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남을 괴롭히거나 억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심성 또한 파괴하는 결과를 낸다는 것을 헤아리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도 그리 많지 않음을 누구라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고정된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고정된 것은 생명이 없는 것,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은 끊임없이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한결 같은 마음’이라는 말을 하는 이들이 종종 있는데, 그것이 대인관계에 있어 참으로 편리하기는 하지만,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 그 한결 같음을 기대하는 것은 늘 실망이나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세계란 살아있는 세계이고, 그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를 속성으로 한다는 것을 헤아리면 변화나 성장의 추이에 자신을 맞춰가는 일이 옳지, 변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마지막 줄의 孩(해)라는 글자는 흔히 ‘어린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나는 여기서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고 풀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눈과 귀를 모으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휘말려 자기 아닌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는 작위(作爲)에 빠지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자기 길을 가는 모습이라는 도덕경 본연의 맥락에 맞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황홀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세계, 무엇에 얽매이지도, 자기만을 주장하지도 않는 길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가르침 앞에서 다시 한 번 숙연해집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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